실은 알고 있었어. 네게 난 그저 연민과 호의의 대상일 뿐 사랑이 아니었다는 거.
이래서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젖은 소녀의 목소리가 좁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세이지는 평생 그 밀도를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My little rest area.
Of Sage Clary.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에 담긴 책임을 알지 못하던 세이지 클라리의 세계는 퍽 좁은 편이었다. 그때가 아직 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적이라고 치더라도 그의 세계는 오만과 삐뚤어진 선량함으로 가득 차 마치 무엇이든 이뤄줄 수 있는 창조주 또는, 마법사가 된 것처럼 굴었다. 또래의 아이들에겐 그 모습이 어른스러워 보였을지 모르나 그것은 폭력의 일종이었다. 어느 날 봄, 그 잔인한 폭력에 배가 꿰뚫렸던 소녀가 기어코 죽고 말았다. 저가 사랑하진 못했을망정 참으로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던 두 눈에 감정의 결정이 차오르며 시커멓게 죽어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본 세이지는 그제야 자신의 세계를 차츰 넓혀가기 시작했다. 어린 날의 세이지 클라리는 인정했다. 자신은 신이 아니다. 마법사도 아니다. 무엇이든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품 안에 품을 수 없는 세계가 너무나도 넓었다.
그 이후 세이지의 입술에 '미안해.'라는 말이 담기는 횟수가 차츰 늘어갔다. 하루는 무리한 부탁을 하는 친구에게, 하루는 여린 감정을 품은 작은 여자아이에게, 하루는 울고 있는 어린 꼬마에게. 그렇지만 실상 바뀐 것은 없었다. 그들은 또 다른 상처를 가슴께에 품고 눈물을 삼켰다. 그 앞에서 세이지는 늘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있지, 이거 피곤해. 벽난로 앞에 앉은 세이지가 얇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말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짧은 적응기에 지나지 않았다. 세이지는 금세 그 고통에 익숙해졌다. 아마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었으리라.
***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텅 빈 오후의 대성당에선 옅은 햇볕 향기가 났다. 그것은 깊이 들이쉬면 마른 먼지 같기도 하고 실제로 어느 곳인가 코를 박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 젖은 나무 향기가 나기도 했다. 세이지는 그 장소를 제법 좋아했다. 단순히 조용하거나 사람이 없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안식처였다. 시간을 따라 흐르는 노을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그렇게 한참을 몰두하고 나면 제법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의 하모니. 초절기교 11번을 쳐줘.
시간을 따라 흐르는 것은 노을뿐만이 아니라는 걸 서서히 알아가곤 했다. 어느 순간부터 세이지는 그 장소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그곳은 휴식의 장소였다. 지금 떠올린대도 '참 즐거웠노라'라고 회상할 수 있는 그런 기억. 가끔 피할 수 없는 비를 피하고자 발을 들여놓던 따뜻한 쉼터. 아마도 그런 것이었다. 알렉스 에반스는 세이지 클레리와 제법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현저히 달랐으며 다른 길을 걸었다.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세이지 클라리는 곧은 자세로 천천히 손가락을 놀렸다. 알렉스는 청아하게 울리는 건반을 가만히 바라보곤 했다. 언제부터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따금 세이지가 낡고 커다란 성당에서 연습시간을 가질 때면 꽤 높은 확률로 그 옆자리를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 분명 제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이 퍽 재미있었을진대 꼭 제 옆으로 다가와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작은 입술을 열고 마는 것이다. 세이지는 그러한 일상을 좋아했다. 오늘 부츠랑 같이 놀지 않을래? 가끔 건네받는 초대장을 기꺼이 꺼내 드는 것도 차츰 익숙해지고 있었다. 파란 잔디밭 위에 커다란 개와 밤색의 작은 아이가 금가루 같은 빛 아래서 뛰어노는 것을 세이지는 그늘서 바라보곤 했다. 그 정적 같은 여유 또한 세이지는 좋아했다. 이제 와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차라리 도피와 같았다. 세이지의 삶은 언제나 완벽해야 하며 누군가 함부로 입에 담을법한 페널티가 차마 티조차 나지 않도록 그보다 뛰어나야만 했다. 삼남이라는 이유로 쉽게 잊혀버릴 이름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런 삶은 쉴 틈이 없었으며 세이지의 삶에 존재하는 숨구멍은 바로 알렉스 에반스와의 그 짧은 시간뿐이었다. 세이지는 다시 한 번 인정했다. 잠시 비를 피하는 쉼터 같은 곳이 아니었다. 연명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대피소였다. 그것은 오히려 두 소년이 세인트 폴 철장 안으로 들어온 이후 더 명확해졌다. 세이지 클라리가 작은 경쟁에 피로해지는 자는 아니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목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뱉어낼 수 있는 곳은 세인트 폴 내에 몇 없었다. 사라진다면 언제 어디서 다시 피어오를지 모를 소중한 공간. 세이지 클라리는 그 따뜻함을 좋아했다.
***
넓지 않은 연습실에 악보를 넘기는 소리가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세이지의 앞에 펼쳐진 악보는 약간의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을 제하면 꽤 깔끔한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무언가 적어놓은 글자 중 뿌옇게 흩어져 있는 것들은 의자에 앉아 무른 연필로 간단하게 덧쓰기도 하고 주의해야 할 부분을 간단하게 더 표시하기도 하며 악보 한 면을 쭉 훑어보던 세이지가 다시 묵직한 플루트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요함밖에 없는 연습실 한쪽에 앉아있던 알렉스가 짧게 시선을 묻혔다. 세이지가 고정해두었던 메트로놈을 가볍게 튕기자 곧 일정한 간격으로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이지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암보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연습을 거친 곡이니만큼 작은 망설임도 없었다. 유난히 크고 섬세한 플루트의 노래가 순식간에 연습실을 가득 메웠다. 빠르지 않은 템포의 곡은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하이라이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닿을 것만 같은 마지막 날갯짓을 남겨두고 세이지는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망설임 없이 기꺼이 숨을 끊어냈다. 혼자 계속 흔들리는 메트로놈을 손끝으로 짚어 끼워 넣으며 세이지가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세이지는 옅은 기시감을 느꼈다. 이보다 조금 더 많이 어렸던 시절 제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어린 꼬마. 그 아이와 저는 이제 꼬마가 아니었다. 무슨 빛이 깃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커피색의 눈동자가 얇게 좁혀졌다. 알렉스의 입술이 열리기 전까지, 짧은 순간 맴돌던 정적은 여태까지 그들의 작은 쉼표와는 사뭇 또 다른 것이었다. 알렉스의 얇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세이지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얇고도 안온하던 무언가가 깨어진—아니, 산화되어 사라진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단어씩 뱉어낸 그의 말 자체는 언제나 그 누구나 쉽게 고백할 수 있는 아주 조그마한 것이었다. 세이지 클라리는 낡은 대성당의 향기를 좋아했다. 알렉스와의 일상을 좋아했다. 그 일상 속 정적 같은 여유 또한 좋아했다. 그리고 쉴 수 있는 그 작은 공간마저 좋아했다. 그러나 세이지는 소년의 얇은 입술에서 새어나온 그 언어들이 감히 그것들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짧게 나와 짧게 끝난 그의 언어 속에는 두 손으로 차마 들어 올리지 못할 무거운 감정의 무게가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이지는 가슴속 무언가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 제 앞에 정성스럽게 접은 편지를 내밀던 귀여운 여자아이가 스치듯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며 세이지는 알렉스의 미소에 화답하듯 옅게 웃었다. 얼굴은 얼굴로, 말에는 말로 화답을 해야 한다. 사뭇 자연스럽게 느린 속도로 입술을 벌리던 세이지는 어린 날, 오만을 천천히 떠올렸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열 살도 되지 않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알렉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세이지는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악보를 덮은 세이지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며 숨을 골랐다.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알. 알렉스. 알렉스 에반스.
세이지의 눈이 작게 접혔다.
“그래.”
짧은 대답이 툭, 던져졌다.
“나도, 좋아해. 알렉스.”
알렉스의 입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지나치게 가벼운 말의 무게에 알렉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은 곡이라도 있니? 8년 전으로 회귀한 것만 같은 질문이었다. 머뭇거리던 알렉스가 작은 숨을 내뱉었다.
“……밤의 하모니. 초절기교 11번을 쳐줘.”
세이지가 짧게 웃었다. 그건 피아노곡인데. 그럼 피아노를 쳐줘. 그래, 그러자. 무거운 피아노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
피아노 의자에 걸터앉은 세이지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아직 익숙한 건반을 손끝으로 하나하나 쓸어주던 세이지가 움직임을 멈췄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이지가 얇은 입술을 길게 찢어 웃었다. 모든 공연과 무대에서 가장 고요한 때는 첫 건반이 눌리기 직전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듯 연습실은 두 소년의 호흡 소리조차 없이 조용했다. 세이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입이 다시 닫혔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단어를 한참이나 입속에서 굴리던 세이지가 제 얇은 입술을 깊이 깨물었다. 만약에,
만약, 나의 미래에 네가 있을 수 있다면 행복할 거야, 알렉스.
옅은 미소를 띠고 옅은 커피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세이지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가장 고요한 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