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Christmas In August
Angelica Gertrude
0.
아니야, 난 겨울이 좋아. 겨울은 모두가 춥잖아.
1.
Angelica Gertrude는 가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면 영 시야도 흐릿하고 숨도 쉬다가 만 것같이 가슴이 답답한 게 그날 하루는 종일 잠 타령만 하는 것이다. 부하의 작은 실책에도 버럭 화를 내거나 밥도 먹지 않고 볕 잘 드는 벤치에 앉아 몸을 데우고 있어도 모든 변명은 ‘오늘 잠자리가 좋지 않았단 말이야.’로 끝내버리니 결국 다른 이들도 그냥 ‘저 여자는 주기적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여자인 모양이다.’ 치부하기 일쑤였다. 다행히 그 중 몇몇은 (철이 없긴 하지만) 평소 애교 많은 Gertrude양의 상태를 걱정해주었지만, 그마저도 늘 그녀 스스로 떼어내곤 했다. 꿈에서 이만한 곰돌이가 나왔는데 나랑 안 놀아줘서 기분이 별로예용. 꿈에 커다란 초코 푸딩이 있었는데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한 입도 먹을 수 없었어용. 아무리 물어도 이러한 말밖에 들을 수 없으니 결국 그 사려 깊은 자들도 별 말없이 그녀의 사정을 존중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흐리게 흩어지는 시야를 다시 눈꺼풀 안에 가둬 놓은 Angelica가 두꺼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늘 그녀의 몸은 추위밖에 느낄 수 없었지만, 아주 가끔 묽은 열기가 차오르는 곳이 있었다. 어김없이 가둬버린 세계 안에서 갈 곳 잃은 열기가 맴돌다 사그라졌다. 눈물을 흘리는 법도, 흘리지 않는 법도 알아버린 짧은 삶이었다.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도로 스며든 열기는 그녀의 얼굴 곳곳을 맴돌다 가슴에 내려앉았다. 참으로 우스웠다. 그녀는 STIGMA 소속이었고 늘 그렇듯 그들이 훈련기에 가장 신경 쓰는 훈련의 성과는 제법 뛰어났다. 이렇게 슬픈 날에도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이제 조금 있으면 일어날 시간이 되겠구나, 무거운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다시 빛을 되찾은 시야가 여전히 흐렸다. 긴 속눈썹을 간질이던 눈물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그래도 따뜻하다. 안젤리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그녀로서도 침울한 제 상태를 마냥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구태여 남 걱정시킬 필요 없잖아용.”
소녀처럼 웃는 안젤리카는 한차례 상담의 앞에서 울어 재낀 직후였다. 선생님, 이건 제가 닫는 자라서 정신이 약해진 것만은 아닐 거예용. 그렇죵? 누구나 이런 커다란 일을 겪고 나면 제법 오래,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선 평생 그 아픔이 따라올 수도 있는 거잖아용?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데 총을 쏘고 목을 조르면서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는 건 참 이율배반적인 것 같아용. 그래도 그걸 해내야 하는 게 제 위치잖아용. 또 이 짓도 오래 하다 보니 오히려 적응되어가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공. 가장 힘든 점이라면 그런 거겠죵. 이거 말공? 음……. 여전히 손발이 차네용. 헤헤! 그래도 다들 만지면 따뜻하대용. 여기, 만져보실래용? 하지만 이건 선생님께서 어떻게 해주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용. 그렇죵? 아뇨, 아니에용. 제가 뭐하러 죄책감 같은 걸 가지고 살겠어용. 생각보다 스티그마는 바쁜 기관이더라고용. 과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용? 앞날 생각하기도 바쁜뎅.
그래도 전 외로움 없이 여기까지 왔지만, 생각보다 많은 닫는 자들이 외로움 속에서 지내왔고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긴 해도 전 부잣집 아가씨로 사랑받으며 살아왔어용. 그 사랑을 겨우 가족 하나 태워 죽였다고 모두 없던 채 해도 되는 건가용? ……죄송해요. 한 번만 더 울게용. 겨울엔 눈물이 너무 많이 나네용. 추워서 그런 거려낭? 아, 선생님. 너무 잔인하세용. 소녀가 울면서 은근슬쩍 넘어가겠다는데 그걸 꼭 짚고 넘어가셔야겠어용? 그런 말 말아용. 여자는 평생 소녀란 말이에용! 그래용. 전적으로 선생님 말씀에 동의해용. 정말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차라리 그냥 있는 대로 말해주는 게 낫겠죵. 그렇지만 동정받는 것도 싫어용. 저같이 귀여운 스티그마의 마스코트가 그런 악몽을 꾼다는 걸 굳이 널리 널리 알릴 필요가 있을까용? 이건 그냥 제 죗값이라고 생각할 거예용. 오, 넹. 할 말 없습니당. 그래용. 죄책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긴 하죵. 그래도 믿어주세용, 선생님. 전 정말 이러지 않았어용.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건지 저도 모르겠어용. 갑자기 옛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런 걸까용? 이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쿠가에게 전가할 나이는 지났는데 말이에용. 이제 정말 그런 쪽으론 사명감도 없는뎅.
그녀의 악몽은 늘 상담시간에만 몰래 속삭이는 비밀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엔 너무나 입이 간지러운 비밀이었다.
2.
“제가 조금만 늦게 피했어도 코트가 홀랑 타버릴 뻔했습니다.”
“제가 조금만 늦게 휘둘렀으면 코트가 아니라 목숨이 홀랑 타버릴 뻔했단 것도 알고 있습니깡?”
새까맣던 하늘이 조금씩 빛을 되찾으면 스티그마의 대원들은 저마다 손에 쥐고 있던 빛을 고이 집어넣는다. Angelica. 그녀 또한 총에 새겨진 저의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제법 능숙한 손길이었다.) 도로 코트 안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스쿠가의 시간이 끝나는 때였다. 더불어 안젤리카에게 가장 추운 때이기도 했다. 오늘도 늘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찾아오는 지독한 추위 때문에 두꺼운 머플러 속으로 코까지 꽁꽁 감추고 있던 안젤리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허공에 천천히 호흡을 뿜어내자 입김이 피어오르다 사그라졌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던 안젤리카가 다시 한 번 길게 입김을 뿜었다. 희게 피어오르던 것이 사방으로 퍼져 금세 다시 사라졌다. 그래, 이렇게 추운데 이 정도 입김은 나야징. 안젤리카가 헤실헤실 웃으며 도로 머플러 속에 얼굴을 감췄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찾아오는 노화현상처럼 어느새 온몸을 잠식해버린 추위는 오직 겨울에만 현실처럼 다가온다. 안젤리카, 나는 여름이 너무 싫어. 익숙한 목소리가 안젤리카의 귓전을 때렸다. 정말로 소녀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를 참 많은 남자아이가 좋아했었는데, 아마 그것은 그녀의 귀여우면서도 당당하게 쭉 뻗는 발성 때문이었을 거라고 안젤리카는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풍족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고급 교육을 받고 자란 막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랑스러움은 무릇 그 나잇대 소년들에겐 견딜 수 없는 유혹과 같았으리라. 안젤리카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싫어? 왜 여름이 싫은 거야? 그럼 그 장미 같은 뺨을 있는 대로 부풀리며 입을 삐죽 내미는 것이다. 여름은 너무 더워. 온종일 땀만 닦다가 손수건이 죄다 젖어 버린다고. 그 꼴이 아주 귀여워 안젤리카가 결국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고 말았다. 늘 그랬듯이 한껏 부풀렸던 볼은 안젤리카가 찌르기만 해도 폭,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홀쭉해졌다. 그랬지, 참. 넌 더위를 참 잘 탔어. 그래도 늘 상냥해서 한여름에 내가 팔짱을 끼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절대 팔을 풀지 않잖아. 이번엔 동생 쪽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젤리카랑 팔짱 끼는 건 좋아, 더운 게 싫어서 그렇지. 그래도 여름이 제일 싫은 이유는 —언니가 또 내 온몸에 불을 지를까 봐. 그땐 정말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동생과의 농담 따먹기에서 늘 안젤리카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안젤리카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미안해.”
“아냐, 괜찮아. 다시 그러지만 마.” 나 진짜로 더웠으니까. 그녀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미안해.”
“……나 정말 괜찮은데.”
“다신 안 지를게.”
그래, 그거면 됐어. 그녀가 찬란하게 웃었다. 안젤리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이제 너는 없잖아. 겨울바람이 안젤리카의 얼굴을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차갑고 날카로운 그것에 눈이 시려 눈가가 촉촉해졌다. 겨울에 눈물이 많이 나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흐르면 뺨이 얼어버릴 것이다. 안젤리카가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 뭐였더라. 그 아이가 정말로 나한테 해줬던 그 사랑스러운 말은 대체 뭐였더라. 이제 하얗게 변해가는 창공이 빙글빙글 돌았다. 샐러맨더?
“샐러맨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안젤리카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제법 멀리서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제 팀원들은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코트 깃을 여민 안젤리카가 차갑게 얼어버린 제 손위에 호, 입김을 불며 총총 달려갔다.
“그거 잠깐 서 있었다고 저만치 가버리는 게 어디 있어용? 왜 아무도 날 안 챙기는 거양!”
“방금 챙겨줬지 않습니까.”
“힝, 더러워용. 코 파면서 챙겨주지 마세용, 트럭”
안젤리카가 주먹으로 트럭의 등을 가볍게 내리치자 아야, 적당히 상대해주던 트럭이 부러 앓는 소릴 냈다.
“아이고, 트럭 죽는다. 이거 보시지 말입니다. 준위님이 때리셔서 제 손가락이 하마터면 콧구멍 뚫을 뻔했습니다.”
진짜 맞고 싶으면 주먹정돈 지금도 불로 만들 수 있어용. 죄송합니다. 익숙한 듯 매끄러운 조크가 오갔다. 가볍게 넘어가긴 했지만, 확실히 오늘은 위험했다. 대원 중 한 명의 능력이 부작용 쇼크로 제때 발동하지 못한 바람에 스쿠가를 잡아주던 서포터 대원이 위험 속에 노출됐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 엄청난 사고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제법 노련한 대원이라 보통 때라면 어지간해선 그 지경까지 몰리지 않았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오늘따라 예상치를 초과하는 스쿠가의 출현에 평소 처리하던 임무의 양보다 제법 넘치게 임무를 수행해야 했는데 반쯤 장난으로 이거 조사한 놈은 시말서 써야 한다고 불평하며 철수하려던 그때, 추가 지원요청까지 들어왔다. 이미 다들 반쯤 오링 상태였다. 추가 임무수행이 불가능하니 다른 팀에 지원을 요청하라고 했으나 거리상 5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팀은 여기밖에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거 팀 배치 한 사람도 시말서 써야 한다. 안젤리카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하여 무리에 무리를 거듭하여 전 팀원 부작용 과다 복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안젤리카도 결국 마지막 불 주먹을 날리기 위해 손가락에 화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안젤리카는 이 정도 화상이면 다 아문 뒤에 흔적도 잘 남지 않겠지. 가벼운 생각뿐이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주려면 몇 번 더 가벼운 대화가 오가야 하겠지만, 그러기에 안젤리카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약 19시간째 근무였다. 깨어있는 시간으로만 치면 24시간을 꼬박 채워간다. 제법 복지가 좋은 직장이었지만, 잘못 까딱하다간 이런 불상사도 생기고 마는 것이다. 안젤리카는 불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피부 관리엔 잠이 중요하단 말이양. 매일 같이 야근이라닝! 감히 나 못 자게 하는 사람들도 다 시말서 쓰라고 해. 게다가 점점 중첩된 부작용이 온몸을 때려대고 또 졸음과 겹치니 안젤리카로선 정말 어디 불구덩이라도 있으면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졸려 죽을 것 같네용. 누가 작고 귀여운 저 좀 업어주실래용?”
작고 귀여운 사람이 없어서 못 업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진짜 죽을 줄 알아용. 안젤리카 역시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피곤해 보입니다.”
“못 견디겠어용. 전 본부 찍고 바로 퇴근할 테니까 알아서들 보고 좀 해주세용.” 흐느적거리며 걷던 안젤리카가 헤헤,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다친 사람들도 그냥 알아서 의무실 들르세용. 내가 알아서 하라고 했단 말은 하지 말공.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아침이 밝아왔다는 증거였다. 다 같이 철야했넹. 회사원 같은 말을 하며 안젤리카가 실없이 웃었다.
3.
그날따라 과도한 임무에 결국 상처를 입고만 K가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나온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주무신다면서요.”
K의 앞엔 자러 간다던 안젤리카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있었다. 준위님? K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부르고 나서야 K 쪽으로 안젤리카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 잠깐 졸고 있었네용. 하얀 연기를 길게 내뱉은 안젤리카가 짧아진 담배를 손끝으로 태워 없앴다. 연기가 아직 흩어지지 않아 희뿌연 공간을 가만히 바라보던 안젤리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K,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뭔가용?”
짧은 침묵 뒤 이어진 안젤리카의 말은 동문서답이었다. 그러나 K는 의문을 갖는 대신 안젤리카의 질문에 서두르지 않고 제법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 여기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대답이 돌아오자 안젤리카의 입술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런가요. 무거운 안젤리카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제가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동생을 죽인 스쿠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어용.”
안젤리카의 동생은 불타 죽었다.
“그렇지만, 왜 아직 남아있는지 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네용.”
모른 척 지나가 주실래용, K. 오늘 고생 많았어용. 늘 그렇듯 흔들거리는 안젤리카의 걸음걸이가 어쩐지 K는 불안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일이 되면 다시 그녀는 헤실헤실 웃으며 분홍 리본 머리띠를 하고 나타날 것이라 확신했다. 어쩐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4.
미래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어. 과거를 추억하기도 바쁜데. 안젤리카 거투르드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