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ow_back_ios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141229 미션1
home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물이 쏟아지면 꺼지는 네게 나는 침을 뱉었다.

  도무지 흔들리지도 꺼지지도 않았다.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

  Angelica Gertrude

 

 

  언제고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코끝이 시릴 정도로 찬바람을 맞으며 무슨 표정인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하늘 밑에서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건 아주 비밀스러운 계획이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안젤리카 혼자 꼭꼭 숨겨온 결심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젤리카가 굳이 그 비밀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게 되었는데, 바로 비밀을 눈치챌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나버린 때였다. 안젤리카는 고민했다. 숨길 가치가 없어진 비밀은 비밀이 맞을까? 비밀의 자격이 있을까? 이건 이제 비밀이 아니지 않을까? 여전히 안젤리카의 품속엔 작은 비밀 계획이 안겨있다.

  결국, 오늘의 공포와 두려움은 비밀로 포장되어 향긋한 라벤더 향을 냈다. 제법 향이 오래가네. 안젤리카가 코 위에 제 손바닥을 얹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코끝에선 옅은 라벤더 향—매캐한 불꽃 냄새가 났다. 냄새를 털기 위해 가볍게 손바닥을 비비며 안젤리카가 창문을 살며시 열었다. 해가 지평선 (아니, 건물 사이라고 표현해야 옳을까?)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이제 곧 다시 나가봐야 했다.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여는 것 말곤 기척 하나 없었는데 용케 어머니는 자식의 기상을 알아차렸다. 들어가도 되겠지? 열려있어요. 안젤리카의 어머니, 에바가 작은 샌드위치 두어 개와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젤리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가슴 한구석이 갑갑해진 안젤리카가 소리 없이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에바는 안젤리카가 나가길 바라지 않았다. 그 감정은 여동생이 불길에 휩싸인 이후에 더 강해졌다. 그러나 에바가 안젤리카에게 매달리는 일은 없었다. 가끔 안젤리카가 상상하는 것처럼 ‘나는 이제 너만 남았어.’, ‘너마저 사라지면 난 견딜 수 없어.’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일도 없었다. 홀로 앉은 에바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당장에라도 그런 말을 꺼낸다 한들 이상할 것 없었지만, 기어코 홀로 남은 딸 앞에서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 스스로 찾은 방어법인지 딸을 위한 배려인지 알 순 없었으나 그런 에바의 모습이 안젤리카에겐 큰 공허함이었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따갑고 메마른 샘이 에바와 안젤리카 사이에 있다. 너무나 추운 여름이었다.

 

  “나가기 전에 이거라도 먹고 가렴.”

  “오렌지 주스 말고 핫 초콜릿 마실래요. 마마.”

  안 돼. 단호한 에바의 입가에 작게 웃음이 걸렸다. 초콜릿 녹이기 귀찮거든. 안젤리카가 어쩔 수 없이 오렌지 주스 컵을 집어 들었다. 슬픔에 잠긴 자의 비약일지도 모르나, 안젤리카가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은 어딘가 이상했다. 이런 대규모 움직임이라니, 환경이 변한 것도 아닌데 그들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왜 다들 아프고 다치고 죽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곧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자아도 없는 이들의 의도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가을 날씨에 맞지 않는 짧은 바지 차림으로 스무 살의 안젤리카가 문을 나섰다. 안젤리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안젤리카가 걸음을 멈췄다. 머리가 다 헝클어졌어. 뒷목을 채 다 덮지도 못한 짧은 단발을 정성스레 빗겨주던 에바가 가만히 안젤리카를 껴안았다. 잘 다녀오렴. 문이 닫히면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혼자가 된다. 에바 거투르드는 혼자 남는다.

 

 

  **

  살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아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던 안젤리카가 작게 입김을 불었다. 요즘이야 예전에 비하면 훨씬 스쿠가의 대접이 좋아졌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지 스쿠가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피를 토했고 그림자였으며 괴물과도 같았다. 옆에서 자욱하게 —한때 스쿠가였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 한가운데엔 불에 눌어붙은 시꺼먼 살덩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안젤리카는 그 살덩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전히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괴물과도 같던 여는 자들이 오늘은 제법 인간 같아 보였다. 본능과 반응으로만 움직이던 그림자가 오늘은 왠지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 발끝으로 살덩이를 데굴데굴 굴리던 안젤리카가 결국, 뒤돌아섰다. 어쩌면 스쿠가가 변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변하지 않는다. 어쩐지 찝찝한 밤이었다.

  딴짓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적대던 안젤리카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곧바로 날아오는 무선에 안젤리카가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지? 사람은커녕 스쿠가조차 없었다.

 

  —샐러맨더 샐러맨더, 여기는 메리. 현재 상황은?

  —여기는 샐러맨더, 구역에서 스쿠가가 더 보이지 않습니다. 대기할까요?

  —아니, 방금 디어 쪽에서 추가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 마침 가까우니 바로 지원 가도록.

  —카피.

 

  담라우 소령에게 위치를 전달받자마자 안젤리카가 신발을 벗어들었다. 알로냑 소위가 있는 곳까지 직선거리는 분명 가까운 편이었지만, 직선으로 뛰어서 3분이면 될 거리를 길을 따라가면 빙 돌기 때문에 시간이 배 이상 들고 만다. 스쿠가 소탕작전이라는 거창한 작전 중에 안젤리카 혼자 뚝 떨어져 구역을 돌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안젤리카가 코트와 함께 힘껏 던진 신발이 건물 지붕 위에 안착했다. 그것을 정확히 확인하자마자 안젤리카의 손이 불꽃으로 변했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건물의 벽을 따라 뭔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금세 지붕 위까지 닿아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지붕 위로 올라간 안젤리카가 능숙하게 신발을 고쳐 신더니 낚아채듯 코트를 집어 들고 지붕 위를 달렸다. 간간이 작은 몸이 반짝이며 불꽃으로 화했다. 비교적 장애물과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동력. 공격과 방어, 서포트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적합한 유연성. 오랜 경험으로 쌓인 노하우와 순발력. 이런 대형 작전엔 어디에 굴려도 좋을 예비번호가 하나쯤 필요했다. 열심히 내달리던 안젤리카가 급히 움직임을 멈췄다. 어느새 전달받은 위치였다. 안젤리카가 전방을 살폈다 여기저기서 스쿠가와 대치 중인 팀이 보였다. 얼핏 눈으로 보기에 그 외에 스쿠가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밑에선 말 그대로 Deer와 스쿠가의 대치였다. 잠깐, 이거 둘이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키릴이 왜 저렇게 가까이 다가갔는지는 바닥에 흩어져 반짝거리는 광물질들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안젤리카가 망설임 없이 워커를 벗어 밑으로 던졌다. 곧이어 코트도 펼쳐 공중에 던지더니 그대로 지붕에서 하강했다. 머리카락과 긴 두 다리가 불꽃에 휩싸였다. 빠르게 땅이 가까워졌다. 인간의 형상을 띈 그림자가 군데군데 인간의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피부는 불에 약했다. —……. 불로 변한 다리가 여는 자의 여린 피부를 덮쳤다. 추락의 충격으로 주변이 폭발하듯 불꽃으로 휩싸였다. 무너져 내리는 스쿠가의 연기가 마치 안젤리카의 불꽃에서 피어오르는 듯했다. 스쿠가를 발판 삼아 점프한 안젤리카가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착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무언가의 말소리가 들린 것은. 착지와 동시에 바닥에 닿은 안젤리카의 발이 불에 종이가 타들어 가듯 뽀얗게 맨발로 돌아왔다. 코트를 집어 든 안젤리카가 그을린 옷자락을 그 속에 감추며 양손을 탈탈 털었다. —부르셨다면서요! 꽤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키릴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안젤리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니겠지. 내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바람에 조금 놀란 걸 거야. 놀랄 수도 있지. 그럼에도 안젤리카는 키릴과 눈을 마주쳤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더라도 귀로는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반 발자국만큼의 망설임이었다. 그러나 키릴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안젤리카가 성급히 고개를 돌렸다. 스쿠가였다. 안젤리카의 눈매가 좁아졌다. 등장과 동시에 소위님 실직자 만든 줄 알았는데 누가 열린 자들 아니랄까 봐 일거리도 열렸네. 양손을 목 뒤로 넣어 코트 속에 갇힌 머리카락을 단번에 빼낸 안젤리카가 손목관절을 풀었다.

 

  “쉬는 시간도 없네요. 역시 우린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이에요. 그렇죠?”

  서포트해주세요, 소위님. 안젤리카의 손목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안젤리카는 아주 가끔 일렁이는 불을 보며 물었다. 너는 왜 살아있니? 입으로 불면 죽을 테고 물을 쏟아도 죽을 텐데 뭐하러 살아있니? 불이 안젤리카에게 도로 물었다. 너는 왜 죽지 않았니? 삶의 이유가 없는 너는 왜 아직 살아있니? 안젤리카가 비웃었다. 내가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어. 파파도 마마도 베티도 모두 내가 죽으면 슬퍼할 거야. 그래도 넌 내게 삶의 이유가 없다고 말할 거니? 이번엔 불이 비웃었다. 응, 그 사람들은 모두 죽어 없는데 넌 왜 혼자 살아 있니, 안젤리카야?

  아직, 아직 라벤더 향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야.

 

  거짓말이다. 제 몸에서 비롯된 불길에 휩싸여 죽는 스쿠가를 보며 안젤리카는 생각했다. 대체 태우는 거 말고 불이 할 수 있는 게 뭐지? 스쿠가 말고 내가 태울 수 있는 건 뭐지? 스쿠가가 없다면 내 생존의의는 뭐지? 이유가 있어야만 유지되는 삶은 고달프다. 그러나 이유 없는 삶은 서글프다. 언젠가 추위와 외로움을 구별하지 못하게 됐을 때부터 안젤리카의 삶은 서글펐다. 피어오르지 않는 입김 대신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연기를 택했을 때, 문득 해답이 스쳐 지나갔다. 스쿠가를 태우는 게 아니라면 태울 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잖아. —……더.

 

  또 과거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샐러맨더!

 

  아니, 현실이었다.

  귀가 터질 듯 울리는 키릴의 무전 소리에 안젤리카가 정신을 차렸다. 등골이 싸늘했다. 지금 내가 전투 중에—아무래도 좋았다. 좋지 않았다. 너무 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위기감이 안젤리카를 덮쳤다. 도저히 눈앞에 있는 두 마리의 스쿠가를 동시에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여길 막으면 저긴 막지 못한다. 막지 못하면…….

 

  —지금 뭐하는 거야.

  —소위님.

 

  지금 당장 후퇴하십시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루멘이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하얗게 드러난 스쿠가의 피부 위로 뾰족한 무언가가 날아와 박혔다. 순식간이었다. 안젤리카가 재빨리 불꽃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채찍처럼 길게 늘어뜨려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상황파악은 그 이후였다. 지금 뭐가 날아와서 박힌 거야? 괴로운 듯 비틀거리는 스쿠가의 몸에 박혀 있는 물체 위에 글자가 적혀있었다.

 

  “맥스웰?” 안젤리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캔 커피라고? 뾰족한 캔 커피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그러나 캔 커피를 뾰족하게 만들 수 있는 자라면 안젤리카는 한 명 알고 있었다.

  아셀.

 

  “상사 레이블. 지원 나왔습니다. 위관님들.”

  그의 말투처럼 아셀이 여유롭게 걸어왔다. 아셀이 걸어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젤리카가 헤실헤실 웃으며 짝짝짝, 손뼉을 쳤다. 우와, 레이블 다트 솜씨 장난 아니네요!

 

  나이스 타이밍, 아셀 딘.

 

 

  0.

  아침이 밝았다. 휴무일이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시간에 눈을 뜬 안젤리카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두 장의 편지가 있었다. 정말 잘못 온 편지가 맞을까. 스쿠가 소탕 작전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이제 희미해질 법도 한 기억은 (그것이 진실이든 왜곡이든) 안젤리카의 머릿속에 점점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편지 없이도 충분히 고민의 대상이었던 그날의 스쿠가는 잘못 도착한 두 통의 편지 때문에 완전히 안젤리카의 의식을 잡아먹고 말았다. 스쿠가가 인간인지 아닌지 말해보라면 안젤리카는 두말할 것 없이 아닌 쪽이었다. 비단 스쿠가에 얽힌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런 세상을 살아온 여인이었다.

  여전히 그 날 불꽃 속에서 잠든 스쿠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말을 하긴 했는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잠을 방해받은 안젤리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편지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들이 인간이어도 스티그마가, 닫는 자가 스쿠가를 죽여야 한다면 죽일 것이다. 안젤리카가 스쿠가를 죽이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스쿠가를 죽여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만약 더는 그런 위치에 있을 수 없다면.

arrow_up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