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걸 두려워하고 같은 걸 힘겨워하고 같은 테두리 안에서 맴맴 돌며 분명 아까 봤던 풍경일진데 슬퍼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 것도 하지 마. 아무 것도 하지 마, 안젤리카.
May I help you?
With Rashid Jibrillte.
“네, 바로 대기하겠습니다.”
갑자기 내려온 대기 명령에 안젤리카는 퍽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그 분위기가 어쩌든 간에 그녀가 속한 곳은 군대이며, 상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오늘 안젤리카의 계획은 하루 종일 능력 부작용을 명목으로 의무실에서 빈둥거리다 밥 때가 되면 슬금슬금 기어 나와 오늘도 힘든 하루를 보낸 척 곡소리를 늘어놓으며 최대한 힘든 임무를 피해 가볍게 뛰어놀고 재빨리 숙소로 돌아와 꿀잠은 자는 것이었으나, 그런 안젤리카의 계획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얄궂은 타이밍에 대기 명령으로 꼼짝달싹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몇 시에 대기 타야 되니까 미리 적당히 놀아두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안젤리카도 알고 있었지만 괜히 이런 거라도 투덜거리지 않는다면 삶에 재미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상사 욕, 나라 욕, 애인 욕이라니까. 맨 마지막은 하고 싶어도 못하니까 그만큼 전자들이 힘을 내야지. 편리한 엘리베이터를 두고 굳이 안젤리카는 10여 층에 달하는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갔다. 으레 그렇듯 이 시간에 내려오는 대기 명령은 그다지 급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모든 명령은 신속 정확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맞다.) 엘리베이터를 누가 타고 가버려서 마음 급한 안젤리카는 계단을 이용하고 말았어요. 조금 가볍긴 하지만 이정도 변명이라면 큰 말썽 없이 넘어가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기어코 계단으로 1층에 도착한 안젤리카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신은 그녀의 편이었다. 안젤리카는 눈앞의 상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안젤리카만이 아니라 닫는 자라면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의도치 않게 땡땡이를 칠 명분을 얻은 안젤리카가 잠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피부와 보잉 선글라스, 단정한 리젠트 컷. 큰 키에 어울리도록 벌어진 어깨선을 따라 길고 시원하게 뻗은 팔이 벽을 짚고 있었다. 이토록 군인의 정석—보단, 뭇 민간인들이 가진 로망에 가까운 사내라면 안젤리카도 알고 있었다. 안젤리카의 입술 끝에 작은 미소가 걸쳐졌다. 그다지 웃을 법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분명 그의 눈은 지금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을 테니 저가 조금 웃는다 한들 별 상관없지 않겠는가. 저런 상황까지 몰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슬픈 모습일지언정 어쩌면 그에게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안젤리카 쪽으로 돌아갔다. 안젤리카가 그를 의식하고 있듯, 아마 이미 그도 그녀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안젤리카가 망설임 없이 앉아있는 다크 톤의 남자—라시드의 옆으로 살랑 살랑 다가갔다.
“라시드 대위님, 이런 곳에 앉아계시면 누가 잡아가 버려용.”
안젤리카가 냉큼 앉아있는 라시드 옆에 자리 잡았다.
“안젤리카 준위.”
당연하다는 듯이 안젤리카의 이름을 부르는 라시드의 눈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안젤리카는 분명 그의 시점이 제대로 맞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라시드의 입에서 가벼운 농담하나 나오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있는 능력의 부작용이었다. 아주 가끔씩 안젤리카가 의무실 안의 이불이란 이불은 다 덮고 땀이 뻘뻘 나도록 난방을 떼도 벗어날 수 없던 추위와 같고 평생 따라오는 질병과도 같으며 결국은 두려움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아마 라시드의 침묵도 조금씩 다를 테지만, 분명 그러한 근원에서 왔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안젤리카의 생각일 뿐이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그보다 훨씬 조그마한 여인은 함부로 입을 떼지 않았다. 단단한 인상을 주는 그 굳게 닫힌 입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의무실까지 동행 부탁해도 되겠나.
안젤리카의 시선이 로비 한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대기 명령이 내려온지 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안젤리카 역시 군인은 군인인지라 결국 빠릿빠릿한 몸놀림을 감추지 못한 탓이었다. 농땡이라기엔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늦은 건 사실이지. 혀를 빼어 문 안젤리카가 라시드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물론이죵, 라시드 대위님.” 마침 저도 오늘 의무실을 가볼까 생각 중이었거든용.
대기 명령만 아니었음 말이에요. 당연히 뒷말은 안젤리카의 비밀이었다.
*
1층 로비와 2층 의무실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다. 라시드 역시 지금껏 한두 번 찾아온 부작용이 아닌지 (흔히 시야가 차단된 이들이 그러한 것과 달리) 걸음에 주저함이 없었다. —어쩌면 그저 안젤리카가 그렇게 느꼈을 뿐일지도 몰랐다.— 여기 앞부터 계단이에요, 라시드 대위님. 작게 이르는 안젤리카의 목소리에 라시드의 몸이 잠시 멈췄다. 라시드가 난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을 텐데도 단번에 난간을 잡아낸 라시드가 그제야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법 심한 키 차이에 불편함을 느낄 만도 했을 텐데 라시드는 군말 하나 없이 계단을 올랐다. 안젤리카 또한 의무실의 문이 열릴 때까지 별 말없이 꼭 쥔 라시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다른 이름, 다른 성별, 다른 삶, 다른 가치. 안젤리카는 늘 스티그마에서 모든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동질감을 얻었다. 그의 어둠이 저의 추위와 같지 않을진대 안젤리카는 허락 없이 그 속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읽었다. 의무실 너머에서 풍기는 옅은 약 냄새보다 아주 조금 더 두렵고 아주 조금 더 무서운 미래가 어쩌면 저 무심한 사내에게도 있을지 모른다며 작은 착각과 작은 안심을 품고. 분명히 언젠가는 누군가도 겨울에 갇혀버린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