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고 망가질수록 그게 내겐 휴식이야.
나를 부숴줘.
Hush of night.
With Callum Peak.
술자리치고 이 정도면 퍽 조용한 축에 속할 수 있겠다. 물론 그것을 평화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하면 이 광경을 보는 누구라도 고개를 내젓겠지만 말이다. 차라리 겨우 두 사람밖에 없는 자리치고 떠들썩하다 표현하는 편이 알맞을지도 모르겠다. 좁진 않지만, 그렇다고 넓지도 않은 방안에 술 냄새가 가득했다. 벌써 거나하게 취한 두 사람을 빈 술병이 잔뜩 매워 쌌다. 여성의 높은 웃음소리가 알코올로 묵직해진 공기를 뚫었다. 남녀가 단둘이 방 안에서 마시는 술치고 제법 무드가 바닥난 모습이었다. 으헤헤헤! 술에 취한 것이 분명한 웃음소리 사이로 남성의 신음과도 같은 저항이 이어졌다. 간지러워요, 괴롭히지 말아요. 술병과 함께 쓰러져버린 여성에겐 그다지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를 놀리며 잔뜩 머리카락을 비벼댈 뿐이었다.
칼룸의 손가락이 안젤리카의 머리카락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마치 작은 동물에게 하듯 나름 풍성하게 솟은 머리카락을 길게 천천히 결을 정리해가며 쓰다듬는 칼룸의 손길이 낯설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안젤리카도 제법 취한 상태였다(이미 제 머리가 드릴이라도 된 것처럼 칼룸에게 마구 비벼댈 때부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취해있었다). 그러나 그런 취기마저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로 엄청난 고백이 터졌다.
“누나…강아지 같…아요…….”
더듬더듬 나른하게 늘어지는 느린 혀를 최대한 움직여 뱉은 그 고백이 안젤리카에겐 퍽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저가 여자치고도 꽤 키가 작은 데다가 머리카락도 오랜 관리의 보상으로 부들부들하기로서니 강아지라니! 저절로 안젤리카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어머머, 강아지라고 말하는 쪽이 더 강아지 같다고 말하면 실례일까. 술기운에 아른아른 흔들리는 시야를 애써 잡으며 안젤리카가 칼룸을 올려다보았다.
“어머, 어머. 애기가 저를 애기 취급하고 있네용!”
이어진 말이 더 가관이다. —강아지 같아서 귀여워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이 제법 기특해 안젤리카가 정말 아기가 된 것처럼 칼룸을 껴안았다. 좋아용! 실컷 귀여워 해주세용! 이런 모습의 칼룸 피크, 통칭 Silence 소위를 언제 또 만나보겠는가. 안젤리카가 으헤헤, 다시 또 웃음을 터뜨렸다.
술로 따뜻해진 피부에 비해 아직 제법 차가운 코트에 뺨을 가져다 대자 작은 살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들 듯 온기가 빠져나갔다. 술로 달아오른 속과 늘 그렇듯 추위에 얼어붙은 피부가 서로 엉키지 못하고 낯설다. 그제야 그녀,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실감했다. 이 추위가 오롯이 그녀의 무너진 정신 틈새를 비집고 찾아온 불청객일 뿐이라는 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열기를 증명하기 위해 더 차갑고 더 따뜻한 것을 찾아 헤맨다. 물론 그 행위엔 안젤리카 거투르드가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몹쓸 장난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 몹쓸 장난이 새벽이 지나고 동이 트고 한낮의 나른함이 덮칠 즈음 어떤 대가가 되어 돌아올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서.
**
뿌연 하늘에서 악취가 쏟아졌다. 밑바닥이 순식간에 한없이 멀어져 온갖 더럽고 냄새나는 것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결국, 희미한 빛이나마 둘러싸고 있던 세계에 어둠이 찾아왔다. 빛은 모두 검은 구멍이나 질척한 것들에게 삼켜지고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구멍 속에선 누군가의 울음이 스며 나와 안젤리카의 가슴 속에 천천히 녹아들었다. 안젤리카는 곧 울고 싶은 기분이 돼버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안젤리카가 화상으로 문드러진 두 손을 들어 코와 입을 막았다. 냄새나는 것들은 질색이야. 어디선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숙인 안젤리카가 제 젖가슴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부작용의 흔적들이 얼룩덜룩 묻어 있다. 그제야 안젤리카는 작금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내가 모든 것을 태워버렸구나.
악취의 정체를 알고 나니 갑자기 욕지기가 차올랐다. 따뜻한 거, 따뜻한 게 필요해.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차갑게 바스러지는 재나 흘러내리는 오물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젤리카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코끝이 찡하게 달아오르며 눈앞이 흐려졌다. 따뜻한 게 필요해.
“따뜻한 거…….”
“따뜻한 징계?”
가라앉는 목소리에 안젤리카가 눈을 번쩍 떴다. 갑자기 바뀐 세상에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온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가슴께가 텅 빈 듯 갑갑해졌다. 현실로 돌아온 고통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밑에서 들려온 남성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덤덤한 표정의 글로리 대위가 안젤리카를 올려보고 있었다. 글로리 대위의 눈이 접히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꿈 꾸셨나, 샐러맨더.”
아, 망했어. 화창한 미소로 답한 안젤리카가 욕을 꿀꺽 삼켰다.
“카아아아아아알룸 소위님!”
본부 로비에 앉아있던 안젤리카가 칼룸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났다.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늘 휴식과 잠을 중요하게 여겼다. 입에 달고 사는 ‘여자 피부에 잠이 얼마나 중요한 데’라는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안젤리카가 기껏 임무를 빠르게 마쳐놓고도 굳이 칼룸을 기다릴 일은 대부분 한 가지밖에 없었다. 속내를 알아차린 칼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전 일이 있고 나서부터 이렇게 가끔 안젤리카의 주도하에 술자리가 만들어지는 날이 있었다.
술자리 자첸 나쁘지 않았다. 주변이 너무 시끄럽거나 저 스스로 너무 취하지만 않는다면야 적당히 정리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 술자리 주최자에게 있다. 늘 안젤리카와 함께하는 술자리에선 그녀도 그도 그 누구도 취하지 않는 법이 없다. 애초에 안젤리카가 칼룸과 술을 마시고자 하는 이유도 바닥을 드러내 보인 모종의 친밀감과 우애 역시 있겠지만, 칼룸이 완전히 술에 잡아먹히고 나서야 나타나는 애교—누나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꼭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는 서러운 일이 있었던 날엔 그녀는 어김없이 칼룸의 팔을 붙잡고 그의 방으로 향하는 것이다.
칼룸 역시 안젤리카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결국은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 술 얻어 마시는 게 어디야. 거의 술을 공짜로 붓는 것에 가깝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음—이건 아닌데—을 애써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모두 잊어버린다면 낫겠지만, 안타깝게도 칼룸 피크는 알코올이 좀 많이 들어갔다고 해서 기억을 잘라먹는 버릇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은 안젤리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같은 행패라 할지라도 안젤리카는 제법 뻔뻔한 성격이었다. 칼룸 소위님, 위스키 좋아하세요? 도리어 뻔뻔한 얼굴로 오늘의 술을 권유하는 안젤리카의 얼굴이 로비에 앉아있던 때에 비하면 퍽 밝아졌다. 칼룸 피크가 오늘도 차마 제 손을 뿌리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안젤리카 거투르드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끝을 아는 시작이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걸음엔 가속이 붙어 어느새 멈출 수 없는 때가 오고 만다. 칼룸 피크와 안젤리카 거투르드의 조금 위험한 술자리가 바로 그러했다. 어느 쪽으로 위험하냐고 한다면 당연히 차마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추억이 또 한바탕 쌓이고 만다는 쪽이었다. 찰칵, 문이 열렸다. 칼룸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런 그를 안젤리카가 잠시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고 결국은 부끄러운 추억만 쌓여갈 뿐이지만, 결국 서로에게 작은 위안이나마 된다면 이런 술친구도 나쁘게 여기진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던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