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ow_back_ios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
150215 미션3
home

 

의미 없어. 나에겐 아무 의미 없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손을 놓지 않은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어느 멋진 날One fine day.

Angelica Gertrude.

 

 

 

안젤리카의 입꼬리가 통 올라갈 줄을 몰랐다. 온 얼굴에 피로가 잔뜩 묻은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기껏 부상이라는 명분 아래 휴식을 좀 취하는 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금세 움직일 일이 생겼다. 저 스스로 덜 아문 화상상처 위에 드레싱을 하던 안젤리카가 문득 화장대 한구석에 놓인 화병을 바라보았다. 여름마다 커다란 꽃을 품는 아름다운 화병이지만, 아직 여름은커녕 봄조차 소식이 없다. 이번 여름에도 이곳에서 저 화병에 꽃을 꽂을 수 있을까? 색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옅은 불안이 안젤리카의 나태함을 스쳤다. 안젤리카가 진통제 한 알을 삼켰다. 꽃병대신 꽃 비슷한 것의 가시를 뽑아 드니 제법 든든한 것도 같았다. 언제고 평온한 날이 있겠느냐마는 요 몇 달 스티그마엔 안젤리카가 저택에 가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통 신경을 곤두세울만한 일 밖에 없었다. 당장 평온한 곳이라고는 기숙사 방뿐이고 문만 열고 나가도 온통 혼란한 공기가 가득했다.

그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 모든 혼란이 스쿠가들의 본부 습격 이후 찾아온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안젤리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마 이 혼란은 아주 오래전부터 차츰 쌓여왔을 것이다. 차오르는 물이 발바닥에 닿고 나서야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조금씩 차올랐을 뿐이다. 물론 가장 커다란 상처가 난 것은 본부의 습격이었다. 온 곳에 부상자들이 차고 넘었다. 왼팔을 통째 부작용으로 내어준 안젤리카가 다 회복하기도 전에 동원되어 나갈 정도니 일전의 습격에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희생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붕대까지 모두 마친 안젤리카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이보리색 천장이 흔들렸다. 아, 귀찮아라. 천사(Angel)의 속삭임이었다.

 

조금,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늦게 왔지롱!”

병실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던 트럭이 안젤리카를 올려다보았다. 안젤리카가 병문안을 오기로 했던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조금 있으면 해가 저물 지경이었다. 용케도 오셨습니다. 그냥 임무 나갈 준비나 하시지 말입니다.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트럭의 왼팔엔 깁스가, 오른팔엔 링거바늘이 꽂혀있었다. 안젤리카가 빠르게 주변을 살펴봤다. 링거액은 거의 다 떨어져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트럭의 상태도 며칠 전에 비하면 비교적 멀쩡해보였다.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는 트럭의 오른손을 보아하니 운동신경도 제법 돌아온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 환자 테를 벗진 못했지만, (어디까지나 안젤리카의 판단 하에) 서포트 포지션 정도야 충분히 설만한 상태였다.

 

“트럭, 몸은 좀 괜찮아요?” 안젤리카가 헤실헤실 웃었다.

“예예, 일해야 되는 누구 준위님과 달리 온종일 놀고먹다보니 몸 구석구석에서 힘이 돋지 말입니다.”

“으응, 잘됐다. 자, 어서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해요!”

아이고, 신난다. 설렁설렁 대답하던 트럭의 손가락이 멈췄다. 나갈 준비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트럭에게 안젤리카가 쇼핑백을 내밀었다. 트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고개를 젓는 트럭에게 직접 쇼핑백의 내용물—제복 코트를 꺼내주며 안젤리카가 해사하게 웃었다. 소위님은 쿠션 데리러 가셨어요. 트럭 상태가 영 별로면 보고하라고 했는데, 좀 많이 늦어버렸네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제이슨 마크 원사? 제이슨 마크, 워네임 트럭의 표정이 똥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싫습니다.”

“입으세요.”

“저는 환자입니다, 준위님.”

“저도 환자예요.”

“오늘 저녁에 열리는 인던 들어가야 하지 말입니다.”

“게임 말고 현실에 있는 몬스터부터 잡아야 하지 않을까!”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트럭의 무릎 위에 안젤리카가 코트를 얹었다. 결국, 트럭이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일시키는 거 보니까 소문처럼 스티그마가 해체된 건 아닌 가 봅니다. 아, 아쉽지 말입니다. 늘 그러하듯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 안젤리카도 바닥에 트럭의 워커를 내려놓으며 작게 웃었다. 흐흐, 이상하게 소문은 폐쇄된 환경이 더 빨라요. 그렇죠? 안젤리카가 두 손을 탈탈 털고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말의 길이는 늘 너무나도 길었다.

 

“당분간 실직하긴 글렀네요. 가는 길에 제가 소속도 마쳐 놓을게요. 갈아입고 준비하고 시간까지 대기 장소로 나오세요.”

 

그렇기에 안젤리카는 기나긴 말이 누군가의 귓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제일 짧은 말들로 꼬리를 잘랐다.

아, 진통제 꼭 챙기는 게 좋을 거예요. 문을 닫으려던 안젤리카가 짧게 덧붙였다. 여전히 피로했다.

 

 

 

**

부분마다 하얗게 변이한 스쿠가가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였다. 애초에 좋지 않았던 컨디션에 오랜 추격까지 겹쳐 안젤리카의 이마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가히 최악이라고 할 만한 상황이었다. 안젤리카의 팀은 현재 스티그마의 사정을 생각하더라도—아니, 애초에 스티그마가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지지만 않았다면 부상이 다 낫지도 않은 닫는 자가 동원될 일도 없었을 테지만— 부상자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비교적 변수요인이 적고 미리 상황 및 규모를 파악한 뒤 투입하기 쉬운 신고 대기조였다. (쉽게 말해 보결 조였다.) 평소 대기조가 하는 일을 생각한다면 한참 쉬고 한참 노는 편한 포지션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달랐다. 대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출동할 일이 생겼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 안젤리카에겐 더욱이 나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정말 나쁜 소식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에 불을 지피며 안젤리카가 눈가를 찌푸렸다. 벽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스쿠가가 녹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안젤리카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팀으로 출발했던 안젤리카 일행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안젤리카 혼자 스쿠가 앞에 서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몰려드는 추위와는 또 다르게 얼굴을 스친 바람이 차다. 잠시 바람에 몸을 맡기던 안젤리카가 순식간에 튀어나갔다. 루멘 몇 발이 느릿한 스쿠가의 몸에 명중하고 새로운 빛을 포함한 모든 스쿠가의 몸통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피 대신 연기를 쏟아내며 스쿠가 덩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화려하게 공중에 뜬 안젤리카도 그대로 착지했다. 그리고 온 몸이 불꽃으로 변했다. 총알이 불꽃을 관통해 날아갔다. 금세 원래대로 돌아온 안젤리카가 급히 구석을 찾아 숨었다. 아무리 순간이었고 약한 불이어도 불은 불이라고 옷이 조금 그을렸다. 그러나 옷이 그을리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느새 주변이 뿌옇게 물들었다. 갑작스런 습격에 놀랐는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몇 번의 소리 없는 기침 끝에 안젤리카가 겨우 호흡을 되찾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신고부터 한 명씩 떨어지게 된 것, 방금 공격까지 모두 포그의 습격이라는 것을. 안젤리카의 심장이 뛰었다. 이제부턴 대인 전투다. 마치 오랜 옛날 기사—라고 하기엔 모두 타락한 꼴이었지만—들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듯 그러한 전투를 하는 것이다. 안젤리카의 머리 위로 공격이 쏟아졌다. 몸을 구르며 회피한 안젤리카가 뿌연 인영을 향해 달려갔다. 스쿠가를 앞에 두었을 때보다 더 깊은 위기감이 안젤리카에게 찾아왔다. —정확히 몇 명이나 왔는지는 몰라도. 불꽃이 넓게 튀었다. 순식간에 공격이 날아왔다. 그보다 더 빠르게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불꽃이 쏠렸다. 넓었던 불꽃이 마치 사그라지듯 가라앉는가 싶더니 크게 터졌다. 비명이 어둠 속을 꿰뚫고 나왔다. 이미 사라졌어야 할 불꽃이 환하게 골목을 비추었다. 타들어가는 고기 냄새가 좁은 골목을 메웠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늘 임무를 나갈 때면 한번쯤 맡고 들어오는 냄새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안젤리카의 기분이 빠르게 더러워졌다. 안 보이는 곳에 숨어있던 자까지 폭발에 휘말렸는지 보이는 것보다 꽤 여러 명의 고함과 욕설이 뒤섞였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인원이 많다면 오히려 잘됐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앞머리가 땀에 젖으면 갈라진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낸 안젤리카가 관절을 꺾었다. 곳곳에 불리한 것들뿐이었지만, 반드시 싸워야만 했다. 또 다시 불꽃이 피어올랐다.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 색이었다.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놀랍도록 익숙한 싸움이었다. 쏟아지는 공격과 위협이 불꽃에 얽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어떻게 보면 우스운 광경이었다. 무슨 가치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한명을 둘러싼 여러 명의 실력자들과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스치는 공격, 피, 불꽃. 꼭 영화 속의 장면 같아 안젤리카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젤리카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부작용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능력을 써댄 덕분에 진통제를 먹은 보람도 없이 벌써 왼팔이 화끈거렸다. 당연지사였다. 아무리 진통제를 먹어도 칼로 찌르면 아프다. 그러나 왼팔을 희생하더라도 당장 저 인영들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젤리카가 죽을 것이다. 안젤리카는 늘 무너지는 세계를 눈 안에 담으면서 언제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것이 이런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를 향해 움직이던 한 인영이 멈춰 섰다. 안젤리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인영이 불꽃에 휩싸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놓은 것 같은 저 경직을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알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떨어졌을지도 몰라. 안젤리카가 그런 생각에 잠겨 흩뿌리는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누군가 얻어 걸린 모양이었다. 안젤리카는 언제고 이런 상황을 상상한적 있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공격과 불꽃 속에 박혀 타버리는 헛된 절망들. 그리고 안젤리카는 마지막 순간 단 한 번의 불꽃을 터뜨리지 못한다. 어느새 절망은 익숙한 실루엣으로 변했다. 베아트리스 거투르드. 더 어려진 저와 다르게 오래전 그날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그녀가 조금씩 녹아내린다. 녹은 액체가 연기와 함께 타들어간다. 어느새 그녀는 그가 되어있다. 두 사람의 입에서 천사가 날아올랐다. 그녀의 몸에 그의 얼굴이 붙고 그의 몸에 그녀의 얼굴이 붙었다. 그 둘은 오롯이 하나였지만 실은 둘이었다. 그 둘은 모두 다른 사람이었지만 결국 안젤리카 안에서 하나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명확히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둘 다 사라진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안젤리카를 덮친다. 늘 상상은 거기서 끝났다.

현실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우선 안젤리카의 표정부터 제법 안정적이었다. 벨라미의 짓이 분명한 빈틈—서포트 사이로 어김없이 불꽃이 타고 들어간다. 반은 타고 그 반은 녹고 나머지 반은 온전한 이들이 도처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듣고 있자니 안젤리카야 말로 소리를 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포그의 전쟁 선포는 이미 지난 이야깃거리이며 벌써 여러 번 전투가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안젤리카가 직접 그들과 칼을 맞댄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제 불꽃에 사람이 타 죽어가는 것을 안젤리카는 처음 보았다. —만약 스쿠가가 정말 인간과 같은 말을 했다면 늘 저런 오열과 함께 죽어갔으리라. 그리고 또 그 오랜 어느 날.

 

“고맙다고 해, 샐러맨더.” 퇴근길에 달려와 줬으니까. 벨라미 메셔가 제법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다.

안젤리카가 벨라미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 밖에 있던 벨라미 메셔가 어느새 안개 속으로 들어와 뿌연 시야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안젤리카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입가에 비로소 헤실헤실 미소가 맺혔다. 뭐든지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해줘야 멋진 남자예요, 스턴.

이대로 평화가 찾아왔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안젤리카의 몸이 다시 불꽃으로 화했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안젤리카의 숨이 점점 먹혀들어갔다. 처음 포그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느꼈던 호흡곤란이 괜히 찾아온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안젤리카에게 이런 기분은 낯선 것이 아니다. 매일 같이 무너지는 세계나 달려드는 추위 이전에 덮쳐왔던 것은 바로 지금 같은 결여였다. 오래전에 메꾼 구멍이 다시금 터졌을지도 모를 일이나, 벨라미의 호흡이 평소보다 좀 더 가빠보였다. 이조차 상대의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막힌 숨을 애써 터뜨리며 안젤리카가 헐떡였다. 찾을 수 있겠어요? 숙인 몸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안젤리카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자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떨어뜨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차, 급히 안젤리카가 고개를 쳐들자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무섭게 공격이 쏟아졌다. 아까와 같은 종류였다. 아니, 조금 달랐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서있던 땅이 지글지글 끓었다. 귓가의 수신기에서 작은 잡음이 새어나왔다. 필드의 전 대원에게 전한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정말 엄청난 타이밍이네. 안젤리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들어가며 연기를 내뿜는 땅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안젤리카가 벨라미에게 눈짓했다.

 

“스턴.”

 

후퇴해야겠네요. 벨라미의 입에서 짧은 불평이 튀어나왔다.

 

 

 

**

연구소에서 만나.

벨라미 매셔의 손이 안젤리카 거투르드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제야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제 머리 위에 머리띠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겠어요.

꼭 영화 같이 힘겨운 일이로구나. 안젤리카가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

도착한 연구소 안에선 벨라미 매셔가 기다리고 있었다. 뒤통수에 차가운 총부리를 댄 채로. 차갑게 식어가는 머리와 다르게 안젤리카의 몸 어딘가는 뜨겁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마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안젤리카는 현명한 선택으로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머릿속에 나도는 수많은 언어들을 잠식시킨 뒤 오직 하나 나오는 언어는 벨라미 매셔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아이작 홀드먼에게.

 

“홀드먼 대위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말이 많지 않은 것은 아이작 홀드먼의 주특기였다. 그의 손이 곧 꺼져버릴 듯 위태로운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든 건 자료를 보고 난 후에, 샐러맨더. 본능적으로 안젤리카는 지금 닥쳐온 상황이 퍽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의 총구에 매달린 벨라미 매셔의 눈가를 스치듯 둘러보며 안젤리카는 황급한 시선으로 모니터를 훑어보았다. 꼭 보여주기 위해 준비라도 한 것처럼 두 개의 폴더는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Newman’, ‘Terra’ 두 개의 문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판단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었다. 정보가 아닌 자료로서 문서를 빠르게 훑어본 안젤리카가 최대한 성급하지 않게—그러나, 서둘러 모니터에서 떨어졌다. 손끝이 잘게 움찔거리는 것을 애써 주먹 쥐어 감추었다. 시간은 흐름과 같다. 흘러가는 것에선 그 무엇도 멈춰있을 수 없다. 그러나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어쩐지 이 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언제라도 벨라미 매셔의 곁으로 다가가 여린 권총을 치워버리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껴안아버리면 되지 않을까? 작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이작 홀드먼의 뒤로 녹슨 벽이 녹아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멈춰있지 않을 세계를 위해 안젤리카는 제 발밑에 떨어지는 뜨거운 쇠붙이를 기억했다. 뒤늦은 총성이 울려퍼졌다.

arrow_up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