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너희들의 언어는 물에 잠기리
언어의 정원The Garden of Words
Angelica Gertrude
1.
폭발음이 아득했다. 늘 끝없는 하늘 아래서 맡던 역한 냄새가 좁은 건물 안에서 퍼지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두통이 찾아왔다. 그러나 안젤리카 거투르드는 코를 막지 않는다. 살점이 타서 눌어 붙은 역한 고기 냄새. 안젤리카의 코끝에만 매달려 있는 그 냄새를 구태여 표현하지 않는다. 아직 제 세계와 타인의 세계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남아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증거였다. 손쉽고도 구차한 변명을 저 스스로 놓아버릴 만큼 안젤리카는 여유롭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담뱃불을 붙인 지 얼마 안 돼 터진 거대한 울음의 원인이 혹시 내가 아닐까? 불붙은 장초를 어린 짐승의 가죽으로 문대며 안젤리카가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스티그마에 붙는 칭호가 많다 한들, 그 칭호들이 전부 진실은 아니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고로 스티그마는 영웅이 아니다. 작은 공적의 의무나마 군인이라는 이름으로 행할지언정 개인 하나하나를 영웅이라고 칭하기에 그곳엔 너무나도 악이 많았다. 그러니까, 안젤리카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갈 의무는 없었다. (물론 가만히 있었어도 곧 무전을 통해 명령을 받았겠지만) 어떠한 지침 없이, 망설임 없이 들어간 본부 안에선 벌써 혼란이 가득 차 숨이 턱 막혔다. —어디서 폭발이 일어난 거죠? 22층입니다. 즉각 돌아오는 답에 안젤리카가 뒤돌아봤다.
“트럭.”
트럭의 창백한 피부 위에 붉은 꽃들이 물들었다. 아직 알아채지 못한 어느 구석에서부터 작은 균열이 시작되었다. 안젤리카는 트럭의 뺨을 타고 흐르는 붉은 땀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미 삶은 죽음을 좀먹고 있다. 아마 그때 벌써 안젤리카의 머릿속에 계획 하나가 자물쇠를 풀고 굳은 다리를 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뜻 보기에 안젤리카는 작은 충격 하나 없는 것 같았다. 트럭이 눈가로 흐른 묽은 피를 닦아내며 안젤리카의 팔목을 잡았다.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트럭의 느닷없는 방해에 안젤리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1층엔 비전투 인원들이 대피하고 있을 뿐, 전투가 가능한 대원이라면 능력을 불문하고 모두 그림자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트럭, 미쳤어? 안젤리카가 낮게 목을 울렸다. 안젤리카는—아니, 스티그마라면 모두 이런 폭발음이 익숙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기어코 벌어졌다. 어떻게 그림자와 같은 것들이 스티그마의 보안을 뚫고 22층까지 올라가 제 몸을 터뜨렸는지 알 순 없으나 가장 우선될 일은 본부의 방어였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긴급 작전을 알리는 비상벨이 울렸다.
“들었습니까? 이제 안 올라가면 명령 불복종인데, 잡은 손 놓지?” 그러나 말과 달리 안젤리카는 트럭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뿌리칠 수 없었다.
“음, 그래용. 이유나 들어볼게용. 30초 내로 브리핑 끝내세용, 트럭.”
안젤리카의 말이 끝나자 트럭이 그녀의 팔을 놓았다. 트럭의 한쪽 팔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있었다. 쓰러져버린 트럭을 내려다보며 그의 피부가 어쩐지 평소보다 좀 더 새하얀 것 같다고 안젤리카는 생각했다.
2.
어린아이 대부분이 그러하듯 어린 안젤리카에게도 놓고 싶지 않은 것 정돈 있었다. 자랄수록 그 바람이 점점 작아졌다는 것은 행운이었으나 불행하게도 그 작은 것조차 안젤리카가 쥘 수 있는 건 단 하나 없었다. —베티, 어떻게 생각해? 이제 곧 헤어지게 될 여동생의 작은 뺨을 찌르며 안젤리카가 속삭였다. 엔젤이 내 뺨을 너무 좋아한다고 생각해! 베아트리스는 늘 이렇게 웃었다. 사랑받는 웃음이었다. 부러 뺨을 볼록하게 부풀리던 베아트리스가 무릎걸음으로 안젤리카에게 다가갔다.
“뭘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집을 떠나서 따로 학교에 다니는 거 말이야.”
엔젤이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천진난만하게 웃는 베아트리스가 예쁘다. 그럼 가지 말까? 안젤리카가 베아트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젤리카의 짧은 머리가 베아트리스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기꺼이 그 간지러움을 받아내며 베아트리스가 안젤리카 머리 위로 제 머리를 기댔다. 안젤리카.
“나는 괜찮아.”
베아트리스의 목소리는 늘 아름답게 구른다.
“보고 싶으면 전화를 할게. 낯부끄럽지만, 엔젤이 받고 싶다면 편지도 써볼게. 그럼 답장은 엔젤이 집에 올 때마다 가지고 와줘. 그리고 헬렌 아주머니가 구워주시는 애플파이를 먹으면서 같이 읽어보는 거야. 그 학교에 안젤리카 말고 다른 신기한 능력이 얼마나 많은지 들려줘.”
가만히 듣던 안젤리카가 제 머리에 기댄 베아트리스의 뺨을 찔렀다.
“그거 마마가 얘기한 거지?”
“맞아!”
안젤리카의 첫 번째 계획이 보기 좋게 물거품이 되었다. 안젤리카, 네 또래의 닫는 자들이 궁금하지 않니? 어느 식사시간 에바의 물음에 답하는 게 아니었다. 안젤리카가 애꿎은 침대 매트리스를 발꿈치로 툭툭 때렸다. 안젤리카가 도무지 기억할 수 없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녀는 이미 닫는 자였다. 그럼에도 집안에서 사랑받는 장녀였고 또한 사랑할 줄 아는 딸이었다. 마마는 안젤리카를 사랑해. 닫는 자인 안젤리카도 사랑해. 닫는 자가 아니라고 해서 더 사랑하거나 닫는 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야. 그냥 안젤리카라서 사랑해. 철없는 어린아이 같지만, 도리어 조숙할 수밖에 없던 특별한 아이를 위해 에바 거투르드는 매일 밤 작은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모두 너를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달콤한 말을 들으며 잠에 빠진 천사는 꿈을 꾼다. 봄의 정원에서 겨울의 거리로 나아가는 꿈을 꾼다. 봄의 따뜻한 흙바닥과 달리 겨울 거리는 아주 딱딱하고 날카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깨어나면 여름이다. 아무 내용도 없는 꿈이 끝나면 늘 안젤리카는 다짐했다. 정원에서 나가지 않을 거야. 따뜻한 정원에서 온종일 꽃에 물을 줄 거야.
그리고 봄에는 비가 내린다. 꽃이 젖으면 안젤리카도 젖는다. 이제부터 안젤리카는 꽃에 물을 줄 수가 없다. 대신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너희를 젖게 해서 미안해. 춥게 해서 미안해. 여름이 지나면 안젤리카는 꽃이 될 것이다. 안젤리카가 꽃을 사랑하듯 거투르드는 안젤리카를 사랑했다. 언제고 놓아야 할 사랑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안젤리카는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입이 없는 꽃은 항상 다른 이를 통해 표현한다.
“나도 그냥 다른 애들이랑 같이 학교 다니면 안돼요? 크리스랑 헤어지기 싫은데.” 굽지 않은 식빵을 입에 문 안젤리카가 조심스럽게 에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잘못한 어린아이처럼 세상이 조금씩 좁아졌다. 엔젤, 에바 거투르드의 상냥한 목소리가 흔들리는 안젤리카의 세계 속에 섞여들었다. 에바가 안젤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영원히 같은 것은 없단다. 모든 건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어. 파파와 베티가 다르듯, 엔젤과 마마가 다르듯, 또 마마와 파파가 다르듯 세상에 똑같은 건 없어. 다 조금씩 다를 뿐이고 모두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거지. 엔젤, 너도 분명 남들과 다르지만, 그것이 무서운 일은 아니야. 남들과 똑같이 다른 것뿐이니까. 중요한 건 그걸 인정하고 너만의 인생을 사는 거란다. 그러니 마마도 네게 한 가지 길을 강요하지 않을 거야.
다시 실패했네. 샐러맨더가 중얼거렸다.
3.
“여기서 저거 터지면 건물이 아니라 저랑 쿠션이 터지는 거예용.”
까라면 까야지. 손발이 떨어질 것 같은 추위를 애써 삼키며 안젤리카가 눈앞의 뿌연 먼지를 손으로 휘휘 밀어냈다. 이미 쿠션의 오른쪽 눈은 멀었다. 부작용이었다. 그의 오른쪽 귀가 점점 들리지 않자 안젤리카는 사각지대 엄호를 포기하고 아예 그의 왼쪽으로 옮겨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오른손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차차 오른 다리까지 멈출 것이다. 진즉 전투불능으로 뒤로 빠지는 것이 나았겠지만—아니, 반드시 그래야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후퇴하라고 명령만 하면 깔끔하게 쑥 빠질 수 있는 줄 아나, 안젤리카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전장 안에 완벽히 갇힌 이상 후퇴가 더욱 어렵다. 언제든 뛰어들 수 있을 줄 알았던 성벽이 순식간에 절벽이 되어 배수진을 치고 말았다. 안젤리카의 왼손이 고통으로 벌벌 떨렸다. 쿠션이 보지 못하도록 손을 뒤로 감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쿠션의 시력은 좋지 않았다.
“준위님.” 혀 한쪽이 굳어 어눌한 발음이었다.
“듣고 있어용.”
“트럭 원사님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기괴하게 꺾였던 그의 팔을 떠올리다 안젤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이번 작전이 종료되고 치료가 끝나면 곧바로 그는 의병제대 할 것이다. 트럭이 그동안 얼마나 돈을 모아뒀는지 모르겠으나, 그가 능력자임을 꼭꼭 숨기고 살다가 갑자기 다니던 대학까지 중퇴해가며 스티그마에 입대한 이유는 그의 앞으로 상속된 거대한 빚 때문임을 안젤리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뿌연 시야 속에 얼핏 보이는 저 스쿠가를 놓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스쿠가를 계속 주시하며 안젤리카가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트럭에겐 통찰력이 있어용. 어쩌면 우리끼리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용. 제 손을 잡았던 건 본능적 반응에 가까운 행동이었을 거예용. 이미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을 테니까.”
트럭은 맨 처음 폭발에 휘말렸다. 창밖으로 떠밀린 그가 겨우 팔 하나를 희생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의 능력 덕분이었다. 만약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트럭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안젤리카가 흐린 시야를 다잡았다.
“쿠션, 마지막이에용. 이거 무사히 뚫으면 상으로 트럭 방 열쇠 드릴게용.” 안젤리카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대로 손끝에 열쇠가 하나 빠져나왔다.
급박한 상황일진데 안젤리카의 얼굴엔 나른한 웃음이 맺혔다. 아까 트럭 부축하면서 빼왔지롱! 쿠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열쇠를 바라보는 쿠션의 눈앞에 안젤리카가 말없이 열쇠를 두어 번 흔들다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트럭이 직접 안젤리카에게 건네준 열쇠였다. —만약 제가 잘못되면 저 대신 들어가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안젤리카는 이 마음 약한 쿠션에게 그 말을 곧이곧대로 전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돌파하면 가서 트럭 병간호할 생각하지 말고 옆에 같이 누워서 치료나 받으세용!” 안젤리카가 한 손으로 루멘을 꺼내 들었다.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잘해낼 수 있을까? 안젤리카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점점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 스쿠가를 가만히 응시하며 안젤리카가 쿠션에게 속삭였다.
아직 빛은 구별할 수 있죵? 네. 그럼 눈앞이 반짝하면 망설이지 말고 돌진하세용. 네.
루멘이 반짝였다.
4.
오랜만에 안젤리카는 꿈을 꿨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봄의 정원엔 커다랗게 자란 나무와 꽃들이 무성했다. 축축한 비 냄새가 정원에 가득 찼다.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높은 나무 아래에 숨으니 안젤리카의 몸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비가 오면 춥지 않아? 안젤리카가 나무에게 말을 걸었다. 축축하게 젖은 잔디가 안젤리카의 맨발을 간지럽혔다. 나무는 대답 대신 도로 안젤리카에게 물었다. 걷는 연습은 끝났니? 안젤리카가 문을 돌아보니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밖으론 찬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안젤리카가 제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직 멀었어.
빗소리 너머 작은 새가 울었다. 처음엔 작은 소리였으나 점점 그 울음이 귀가 따갑도록 커졌다. 새소리 때문에 나무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걷는 연습이 끝나……. 다시, 다시 말해줘. 안젤리카가 소리쳤다. —……끝날 때까지 이 정원이……. 귀가 너무 따가웠다. 귀청이 터질 것 같았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안젤리카가 소리 질렀다. 시끄러워! 조용히 해!
“시끄러워!”
안젤리카가 눈을 떴다.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이 짹짹대고 있었다. 손을 더듬어 알람을 끈 안젤리카가 습관처럼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창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결국 포그가 전쟁을 선언했다. 스티그마에게 퍽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흐린 눈으로 상태 표시줄에 있는 작은 시계를 들여다보던 안젤리카가 힘없이 핸드폰을 매트리스 위에 떨궜다. 잠든 지 2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걷는 연습이 끝날 때까지 이 정원이 너의 피난처가 될 순 없어. 꿈에서 듣지 못했던 말이 현실에서 선명했다.
안젤리카는 그 말에 동의했다. 무릇 닫는 자들이란 걷는 연습이 끝나면 죽고 마는 존재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