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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여신(餘燼)
140628 신청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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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미쳐가고 있어. 모두 납득하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지. 그건 멈추지 않는 구름이 잠시 머물러주길 바라는 것 같은 억지일 뿐이야.

 

 

Prologue. 신과 여신.

당신과 여신(餘燼)

 

 

쾌청한 하늘 위를 고아하게 질주하는 한 마리 여린 새처럼 그의 가는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선율이 낡은 성당 안을 맴돌며 흩어졌다. 언제고 제대 앞 텅 빈 천장을 향해 힘없이 툭 뱉어낸 말조차 높은 아치형 기둥을 따라―감출 수 없는 죄악을 벌하는 것처럼 기어코 한가득 울려 퍼졌던 것과 사뭇 다르게 여린 새의 솜털은 결코 아담하다고는 할 수 없는 구 성당의 벽 끝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뚝뚝 떨어져 나갔다. 반걸음 정도 물러선 오른 다리와 45도 틀어져 곧게 뻗은 상체,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비치는 빛이 길게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빛의 목관악기가 섬세한 손끝에서 반복적으로 유린당하고 있었다. 아직 여름의 온기가 남아있다곤 하지만 제법 서늘해진 날씨와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성당 안의 냉기 속에서 얇고 가는 머리카락이 잔뜩 젖어 얼굴에 가득 달라붙을 정도로 연주에 열중하던 밝은 금발의 소년, Sage Clary는 지그시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열었다. 그제야 소리 없이 깊은 호흡을 뱉어내며 혹사당한 플루트를 목제 의자 위에 올려놓은 그가 낡은 그랜드 피아노 옆에―마치 연주하던 때와 같이 곧은 자세로 기대어 서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교복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여신 무라이.」

 

어느 문학도의 새로운 작품이려니 가볍게 넘겼던 그 쪽지가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았다면 그 어떤 학교도 아닌 세인트 폴 남학교에 다니는 문학도의 신작 제목으론 상당히 불경했다는 것과 아무리 섬세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구태여 제목만을 유려한 서체로 적어내어 작은 오차도 없이 단정하게 반으로 접어서 들고 다니진 않았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쪽지 하나를 잡고 깊이 탐구할 만큼 세이지 클라리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푸른 잔디 사이 이질적으로 놓여있던 짤막한 쪽지의 내용을 확인했을 때에도 주인이 되찾아갈 수 있도록 도로 내려놓으려고 했으나 때마침 눈이 마주친 검은 옷의 사제에게 자신의 선심(善心)을 오해받고 싶지 않아 얌전히 주머니에 넣었을 뿐 쪽지 자체에 대한 어떠한 의구심도 의미도 전혀 없었다. 가소롭게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날 하루가 특별히 다른 것도 아니었다. 늘 그랬듯 얼마 남지 않은 신학기를 위해 책을 몇 권쯤 읽고 식사를 하고 음악실에서 플루트를 조금 연습했을 뿐, 아니 그날따라 음악실 한편에 놓인 조율 풀린 바이올린이 눈에 밟혀 짧은 곡을 연주하긴 했지만, 그것이 쪽지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었다. 실제로 그때 이미 세이지는 쪽지에 대해선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굳이 한 가지 이상 징후가 있었다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하루 끝에 몰려온 노곤함이 생각보다 무거워 늘 석 장 정도는 읽었던 성경을 한 장 정도 가까스로 읽고 반쯤 잠에 취한 상태로 저녁기도를 마친 뒤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꿈은 그로서는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악몽이었다.

어떤 언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오히려 규칙 없는 아우성 쪽에 가까운 음울한 소리가 방향 없이 들려오고 눈이 뻑뻑해질 정도의 밀도 높은 어둠이 가득 둘러싸고 있는 불경한 냄새가 나는 장소였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그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즈음에서야 그는 밀도 높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인영들이 잔뜩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정체 모를 소리 또한 이 자들이 검은 망토를 똑같이 뒤집어쓰고 내는 소리였으며 단순히 기괴함만 존재할 뿐 어떠한 것이라고 정의하기 힘든 그 공간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어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텅 빈 공간에 일정한 규칙을 따라 앉거나 서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검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며 그중 서 있는 자들은 무언가―아마도 성물을 두 손으로 들고 차례대로 위로 들었다 내렸다 하며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정 가운데, 언뜻 여인의 실루엣이 비치자 세이지의 뇌리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여신 모독의 대가.’ 이 학교 학생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것은 분명 그 여신을 모시는 집단의 사이코 틱 한 종교의식이리라.

그러나 세이지는 그 불경한 공간에서 빠져나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의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몸을 돌리고 걸음을 움직이려고 해도 그의 몸은 의식을 잃은 인형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들려오던 음울한 아우성 위에 기괴한 함성과 절그럭거리는 금속의 마찰 소리가 겹쳐 점점 커지기 시작하고 기어코 세이지의 고막에서 터질 것 같은 압력과 고통이 느껴지자 공포심과 위기감에 뒤덮여 그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틀어냈다. 그러나 움직이는 몸은 앞으로 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버둥대던 몸이 점점 하늘 위로 솟구치다가 천장 위 샹들리에와 부딪치자 다시 그 불경한 공간에 어둠이 엄습했다. 우스운 이야기였다.

 

세이지는 그 우스운 충격에 눈을 떴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을 침대 시트에 문질러 닦아내며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커튼에 차마 가려지지 못한 햇빛이 한꺼번에 그의 얼굴로 쏟아졌다. 이미 점심때였다.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거의 열네 시간 이상은 자 버린 모양이었다. 룸메이트도 그를 대충 깨우다 말고 나가버렸는지 방은 이미 텅 비어있었고 주인을 닮아 늘 가지런한 책상 위에 작은 쪽지가 놓여있었다.

 

여신 무라이.

아무 종이나 찢어 던져놓았는지 길쭉한 삼각형 모양의 갈색 쪽지를 보자마자 세이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제의 그 반듯하고도 정중했던 쪽지였다. 차분하게 내리깐 눈으로 책상 위 쪽지를 바라보던 그가 무심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금색으로 빛나는 묵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죄악감에 얕게 떨리는 입술을 깊게 다문 그가 상체를 완전히 앞으로 숙여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늘 습관처럼 외우던 아침 기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단어로 시작했는지 모호한 문장들과 절그럭거리는 금속의 소리, 모르는 이들의 낮은 주문 소리가 뒤엉켜 도무지 무언가를 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전교생을 충격에 빠뜨리고 전국의 기자들이 세인트 폴 남학교의 정문을 뚫고자 안간힘을 쓰게 만들었던 그 사건은 1년 전이나 10년 전의 것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 사건을 까맣게 잊었다는 것보단 차라리 무의식적으로 불건한 생각을 피해버렸다는 쪽이 조금 더 신빙성 있을 것이다. 죄악감 다음엔 수치심이었다. 당장 저 잔악한 여신 무라이를 태워 버리겠다며 이불을 박차고 일어서던 세이지의 무릎이 꺾이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아침 약을 먹지 못했다.

 

 

**

책상 위 갈색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서 대신 체크해줬으니 수수료와 케이크값 이른 시일 내에 지급 바람.」

 

결국, 밀려오는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걸터앉은 세이지가 그의 룸메이트가 남겨준 손바닥만 한 조각 케이크를 늦은 아침으로 먹고 아침 약을 삼킨 뒤에도 몇 시간쯤 침대에 기대 누워 책과 종이를 펴놓고 검은 잉크 펜으로 서너 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가까스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기에 세이지는 서둘러 플루트 케이지를 챙겨 방을 나섰다. 그 이후에 늦은 점심을 먹고 곧바로 구 성당으로 들어온 것이 지금. 오랜 친구였던 플루트에겐 미안하지만, 세이지는 확실히 연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속죄의 장소가 필요했으며 해소의 도구가 필요했다.

여신 무라이. 짤막한 쪽지의 내용이 세이지의 손끝에 엉겨 붙었다. 시선을 돌려 벽에 장엄하게 걸려 있는 예수의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그대로 툭, 쪽지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플루트를 챙기고 뒷정리를 마친 뒤 제대 앞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던 세이지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쪽지로 향했다. 쪽지는 두 장이었다. 세이지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분명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학교 곳곳에 같은 쪽지를 뿌려놓는 것이리라.

그가 덤덤하게 바닥에 떨어진 두 장의 쪽지를 집어 들었다. 접힌 종이를 펴보니 역시나 ‘여신 무라이’라고 적혀 있는 쪽지였다. 제발, 세이지가 저도 모르게 작게 읊조리며 다른 한 장의 쪽지를 펴냈다.

‘너의 배덕이 나를 슬프게 하였으나……’로 시작되는 장문을 눈에 담던 그가 툭, 쪽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린 그가 손을 더듬어 플루트 케이스를 찾아 헤매다 이미 플루트 케이스를 챙겼었다는 것을 가까스로 깨닫고 재빨리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도망치듯 구 성당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금요일엔 고해성사를 해야겠다고 세이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쪽지에 적힌 기도(祈禱)는 그가 그날 꾸었던 꿈속 검은 망토의 신도들이 끊임없이 읊조렸던 바로 그 기도였다.

 

방으로 돌아온 세이지가 플루트를 내려놓자마자 급하게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늘 그렇듯 갈색 표지의 성경이 놓여 있었다. 그의 평온한 얼굴에 머물렀던 작은 긴장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그러나 급하게 성경을 펼치는 그의 손은 답지 않게 불안에 차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사이 차오르는 두려움을 잠식시킬 한 줄기 빛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다급한 손길에 얇은 종이는 마구잡이로 구겨져 비명을 질렀다.

 

「그 뒤에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아론을 시켜 수송아지를 만든 데 대한 벌을 내리셨다.」

 

펼쳐진 성경은 스텐드의 빛을 받아 하얗게 반사되고 있었다. 그 아래 웅크리고 앉은 그의 옅은 금발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외우던 그의 입술이 잠시 멈추어 섰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구하소서. 유약한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모두 사하여 주소서.

 

“아멘.”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사탄 앞에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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