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에 띄게 하늘이 흐리다 싶더니 2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불행하게도 다음 수업을 위해 건물 하나를 지나야 하는 몇몇 학생들은 품위를 잃은 모습으로 세인트 폴의 푸릇한 잔디밭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으며 몇몇 현명하고도 지혜로운 학생들은 여유롭게 우산을 펼쳐 무섭게 쏟아지는 하늘의 심술을 피해갔다. 그리고 세이지는 몇몇 학생들이 지루하다고 일컫는 C 신부의 신학수업 복습을 간단히 마친 후에야 뒤늦게 창밖을 바라보며 짧은 감상에 빠졌다.
‘점심시간엔 잔디밭에서 시간을 보낼까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공책을 덮으며 시계를 바라본 세이지가 짧게 탄식했다. 10시 55분, 슬슬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다음 수업에 늦을 것이다.
The horizon is not boundary of the world.
With Kisel Edward.
“세이지, 아직 있었네!” 교실을 나서려던 순간 뒷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년 연속 같은 층 기숙사를 썼던 전력과 같은 음악학부라는 공통점까지 겹쳐 꽤 친하게 지내고 있는 4학년 K였다.
“뭘 두고 간 모양이지.” K는 꽤 상습범이었다.
“하하, 공책만 달랑 들고 나왔어. 다음 수업도 나랑 같이 듣지? 같이 나가자, 세이지!”
먼저 가면 안 돼. 못을 박는 친구의 애절함에 소리 없이 웃던 세이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K는 늦더라도 모범생 딱지를 단 친구를 인질로 잡았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은 듯했으나 세이지는 수업에 늦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K가 누군가 자신의 펜을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며 화를 내고 있는 사이, 세이지는 가볍게 바깥을 살폈다. 가깝다고 할 순 없는 교실을 생각하면 걸어선 턱도 없는 거리였다. 무엇보다 이 자유분방한 친구와는 다르게 세이지는 늘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이전 수업―평범한 오리엔테이션에 불과했지만―내용을 훑어보고 수업에 대한 준비를 완벽하게 해두어야만 했다. 다행히 곧 벌어질 그들의 질주를 방해할만한 요소가 없다고 판단될 때쯤 K에게서 찾았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어떤 놈이 내 책상을 치고 갔나 봐! 창가까지 굴러떨어져 있었어!”
그 빌어먹을 놈은 수업 끝나자마자 비 온다며 뛰쳐나간 K임이 틀림없었다.
세이지는 그것에 대해선 특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시계를 흘끔 바라보며 상냥하게, 그러나 명백히 서두르라는 듯이 그를 재촉할 뿐이었다.
세이지가 문을 나서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이제 곧 수업 시작이야. 슬슬 나가야…….” 윽, 맺지 못한 말 뒤로 짧은 신음과 함께 우당탕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셀!”
“세이지!”
앞뒤에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완전히 엉덩방아를 찧은 세이지는 둔탁하게 올라오는 고통에 옅게 눈가를 찌푸리다 들려오는 이름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곳엔 세이지를 향해 뻗은 손이 있었다. 복도를 밝게 비추는 불빛이 순간 시야를 방해했으나 세이지의 눈 안에 들어온 얼굴은 퍽 낯익은 모습이었기에 알아보는 데 그다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영국의 도련님들이란 도련님들은 다 모인 이곳에서도 확실히 눈에 띄는 또렷한 얼굴, 귀족보다도 더 귀족다운 품위를 뽐내며 화려하게 반짝이는 블론드 머리카락과 깊은 눈매. 세인트 폴에서 반 학기 이상 지내본 이라면 모두 한 번쯤은 이름을 들었을 법한 유명한 모범생, 키셀 에드워드였다. 세이지 역시 4년간 그가 있는 세인트 폴에 있었으므로 이름을 들어본 것은 물론, 얼굴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의 존재 자체가 새삼 놀라울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어쨌든 그런 유명인의 손을 무색하게 만들 순 없지. 방금 충돌은 전적으로 세이지의 책임이 컸다. 약간의 고마움과 약간의 미안함, 세이지는 기꺼이 키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마음이 급해서. 누가 오고 있을 줄은 몰랐어. 미안.”
바닥에 어지럽게 물건들이 흩어져있었다.
“이쪽도 텅 비어있을 줄 알았던 교실에서 누가 나올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군.”
형식적인 인사는 굳이 길어질 필요 없었다. 짧은 사과를 주고받은 두 남자는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흰 복사용지 위에 일정이 프린트된 수업자료와 청색 파일, 아마도 펜과 연필 등이 두 자루 정도 들어있을 작고 가벼운 필통, 길고 고급스러운 장우산과 옅은 갈색의 얇고 심플한 표지, 두 권.
흩어진 물건을 줍던 세이지의 손이 잠시 멈췄다. 학교 밖 출입이 거의 없는 학생들은 학교 내 편의시설에서 판매하는 공책을 사용하곤 하지만……. 시야에 살짝 걸리는 키셀의 구두가 눈에 걸렸다. 공책 하나도 기성제품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러한 세이지의 생각을 입증해주듯 깔끔하게 관리된 키셀의 구두는 스티치가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키셀의 구두가 Goodyear Welt인지 Hand Sewn Welt인지 저 공책이 키셀의 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았다. 흩어진 자료들과 공책을 수습해 주워든 세이지가 키셀에게 공책을 건네주었다.
“여기.”
역시 흩어진 물건을 주워들던 키셀이 받으며 말했다. “아, 고마워.”
그 뒤로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키셀 에드워드는 들려오는 소문처럼 착실하고 매너 있는 모범생이었으며 세이지 클라리는 늘 그렇듯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당한 인사와 적당한 헤어짐 끝에 세이지는 키셀 에드워드에게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어 교실에 도착할 때까지 찜찜한 마음을 안고 있던 세이지는 자리에 앉고 조금 뒤 선생님께서 들어오고 나서야 그 감정의 정체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키셀은 세이지의 큰 형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와는 근본적으로 무언가 달랐지만 세이지에게 키셀은 마치 큰 형과 같은 것이었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었으며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세이지의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그 너머의 경계였다. 아무리 망원경을 쓰고 시야를 넓혀본들 자기 스스로 걸음을 옮기지 않는 이상 절대 사라지지 않을 지평선.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볼 생각도 욕심도 없는 세이지에겐 아마 그 이상은 평생 볼 일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세상의 끝이었다. 세이지의 세계엔 큰 형 너머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키셀 너머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의 입구―또는 출구에 서서 희미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명확한 존재를 자랑하는 그들은 늘 세이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너머가 여기 있도다.
그러나 세이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큰 형과 키셀 모두 세이지에겐 세상의 끝자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차분한 선생의 목소리가 수업 시작을 알렸다. 답지 않게 생각에 빠져있던 세이지는 그제야 아직 새것의 느낌이 가시지 않은 빳빳한 공책을 펼쳤다. 그곳엔 낯선 서명과 함께―우등생들이 으레 그렇듯 그로선 알아보기 힘든 방식의 필기가 가득했다. 세이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행히 아직 선생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노트를 덮은 세이지는 신학수업의 프린트를 꺼내 텅 빈 뒷면이 보이게 뒤집었다. 파일의 집게로 잘 고정하자 나름 그럴듯해 보였다. 오늘 수업의 필기는 이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세이지는 수업 내내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필기를 다시 제 공책에 옮겨야 한다는 성가심 때문은 아니었다.
“아까 키셀 에드워드였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은 세이지 혼자가 아니었는지 선생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K가 말을 걸어왔다.
“왠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어. 신기하네…….”
세이지의 대답이 없음에도 K는 계속 소곤댔다.
“사실 세이지, 널 처음 봤을 때도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다 그런가?”
결국, K의 딴짓을 발견한 선생의 작은 경고가 있고 나서야 K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이지는 덮어둔 옅은 갈색의 공책을 바라보았다. 다시 가져다줘야겠지. 저에게 손을 내밀었던 블론드 머리카락이 다시 떠올랐다. 또 한 번 그를 만나게 된다면 지평선이 뭐라고 말할지 아주 조금, 세이지는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