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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old.
140713 킴벌리 관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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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틀리지 않았어. 잘못되었을 뿐이야.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그를 덮쳤다.

 

 

Too old.

With Kymberly Lightbird.

 

 

그날 비가 왔던가? 아니, 햇볕이 내리쬐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기억이 안 나. 다들 네가 멀쩡히 바이올린 수업을 받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날 말이야. 나는 발본 씨가 그렇게 두려움에 떠는 건 처음 봤다니까? 다 널 사랑하기 때문이었겠지. 그땐 나도 어려서 방문을 잠그고 세이지, 네가 켜는 것처럼 바이올린을 3시간은 연주했어. 유모와 레일라 씨는 어머니께서 들으실까 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온 저택을 누비며 널 찾으러 다녔는데 둘 다 바보같이 네가 밖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나 봐. 하긴 네가 언제 밖을 나가봤다고. 안 그래?

사실 나도 놀랐어. 네가 지하 와인창고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으면서 클레리의 철문을 열고 나가서 어딘가 엉덩이 붙이고 있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

오늘 네 꿈을 꿨어. 세이지, 그땐 나도 어려서 사랑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 못 했지. 이거 부끄럽네, 사랑. 이제 와 네가 없는 저택에서 네 생각을 해보건대 혹시 그날 아침 내가 했던 말이 마음에 많이 걸렸다면 늦었지만 사과하마.

비겁하지? 그렇지만 넌 학교에 갇혀서 나올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까 벌이라고 생각해. 그 학교를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한 번쯤은 올 수도 있었잖아. 빌어먹을! 큰 형은 어떻게 편지를 쓰는지 모르겠지만 이거 쓰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네? 넌 형님 얼굴도 안 보고 싶으냐! 어떻게 된 놈이 전화 한 통도 없어? 인마, 너 학교에서 죽었어? 내가 널 얼마나 예뻐해 줬는데 너 이런 식으로 나를……(하략)

 

 

세이지는 편지를 덮었다.

 

 

 

**

그것은 확실히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얼굴이 땀에 젖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년이 어른 한 명 없이 혼자 도서관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소란하나 피우지 않는 이 소년에게 대부분 짧은 시선만 건넬 뿐, 큰 의심 없이 저 수많은 책상과 책장 사이에 소년의 보호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소년은 말없이 책장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니다 제 체구로 들기엔 제법 무거워 보이는 책 한 권을 뽑아 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높은 책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유롭게 늘어진 책상과 의자에 몇 명 없는 사람들이 앉아 제 일을 보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어른들의 만년필 소리. 한낮이 지나가지 않은 시간임에도 그곳에선 흡사 비가 왔던 것 같은 저녁의 건조함과 진한 종이 냄새가 있었다. 커다랗고 높은 창문은 블라인드로 가려놓아 그 틈새로 조금씩 햇빛이 어른거렸다.

소년은 그 자리가 퍽 마음에 들었다. 소년의 동선만 본다면 그가 초행길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 그는 큰 형의 손을 잡고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막냇동생에게 오래된 저택의 멈춰있는 서재가 아닌 늘 움직이는 책 나라를 선물하고 싶었던 맏이의 깊은 생각이었지만, 만약 결과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는 절대 이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 키보다 조금 더 높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두꺼운 하드커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이 소년은 가출한지 약 47분 53초 되었고 아직 집안의 그 누구도 그의 가출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입기엔 병적으로 가지런하고 단정한 옷매무새, 천연색이라고 보기 힘든 밝은 금발. 머리카락만큼 밝은―아니, 오히려 더 창백한 피부가 고요한 도서관 속에서도 마치 소년의 주변만이 어디론가 뚝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신기하리만치 아무도 소년에겐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모두 제 앞의 작은 책에 집중하거나 조금 더 커다란 종이 더미를 만지작거릴 뿐 말소리 하나 없는 소년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년은 그 환경이 퍽 마음에 들었다. 되는대로 마음껏 책을 읽다가 잠시 눈을 감고 작게 열린 창 너머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기도 하며 무엇이든 멋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지 않아 질려왔다. 소년은 늘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홀로 할 수 있는 것은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이미 실컷 해보았다.

 

 

“저 모퉁이를 돌아.” 바람이 속삭였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곳엔 소년이 모르던 장소가 하나 더 있었다. 삭막한 어른들의 종이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제 또래의 작은 웃음소리와 낮은 의자, 푹신한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페이퍼 북이 자유롭게 팔랑거렸다. 소년이 소파 위에 앉아 그 옆에 놓인 얇고 작은 책을 집어 들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짧은 동화였다. 책장을 펼치기 직전, 시선을 느낀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찬란한 자안(紫眼)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세이지, 찬란한 자안을 가진 소년은 킴벌리. 두 소년은 서로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

 

“저택이 얼마나 커다란지 모르지? 해가 질쯤이면 정말 아름답거든.”

“조금 있으면 해가 질 텐데.”

“다음에 같이 가자.” 오늘은 안 돼. 혼자 나온 게 아니거든. 속삭이듯 덧붙인 킴벌리가 즐겁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세이지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늘 세이지의 세계는 작고 커다랬으며 좁고 숨 막힌 넓은 초원이었다. 늘 캐모마일을 쫓던 세이지의 눈은 정적이었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들어올 필요도 없었으며 제 또래와의 대화는 작은 선심이었을 뿐이었다. 저를 막아서는 나약함은 모두 부술 수 있었다. 거만이 잠든 세이지의 눈과는 달리 킴벌리의 눈 속엔 유동성을 띈 빛이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감탄과 웃음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 가볍고 따뜻한 웃음 속엔 그의 형이 있었다. 우리 형은 정말 대단해! 응, 우리 형도 대단해. 사소한 말 꼬리에서부터 줄줄이 자랑이 새어나가기도 했고 도서관 옆 꽃집에 귀여운 꽃바구니가 있다는 작은 이야기까지도 즐거웠다.

왤까? 세이지는 문득 킴벌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보라색 빛이 일렁였다. 세이지는 킴벌리에게서 나오는 뚜렷함의 뿌리를 알 수 없었다. 빛날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세이지는 답을 내릴 순 없었지만 어쩐지 그 빛을 조금 받아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배가 고픈 자에겐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목이 마른 자에겐 우물 파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아주 잠시 일렁이는 빛 같은 것은 작은 동화책을 한 장 넘기는 동안에도 사라질 것이다.

네 빛은 어디서 오는 거야? 난 그 뿌리를 가지고 싶어. 킴벌리. 찰랑, 몸을 세이지 쪽으로 틀기 위해 자리를 정돈하던 킴벌리의 팔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참(Charm)이었다. 세이지의 눈이 조금, 빛났다.

세이지의 눈빛을 읽은 킴벌리가 손목을 들어 짧게 흔들었다.

 

“이게 마음에 들어?”

 

세이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거려서 예쁜걸.”

특히, 저기 작은 새. 세이지의 하얀 손가락이 킴벌리의 손목에 달려있는 카나리아 모양의 참을 가리켰다. 어쩔까, 짧게 고민하던 킴벌리가 세이지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웃음을 띠며 주섬주섬 제 팔에서 무언가 떼어내기 시작했다.

 

“나 이제 가야 될 것 같아. 다음에 또 보자!” 급하게 킴벌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쑥스러웠는지 밝게 상기된 얼굴로 베실 웃는 킴벌리를 한번, 제 손바닥 위에 올라간 작은 참을 한번 차례대로 바라보던 세이지가 옅게 웃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안녕, 손을 흔들며 작게 인사하고 사라지는 킴벌리의 뒷모습을 보며 세이지는 가만히 생각했다.

집에 돌아가야지.

 

 

 

**

세인트 폴 남학교의 모든 행사는 대부분 화려하게 진행된다. 그것은 그들의 품위에 맞는 규모였으므로 수많은 소년들은 응당 그 거대함을 받아들이곤 했다. 세이지 클라리도 1년 전에는 바로 저 자리에 서서 제법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따분할 따름이었다. 방관자가 되어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은 적당한 오만과 승리자의 그것이 가득 차있었으며 얼핏 긴장감도 느껴졌다. 저도 그런 모습이었을까? 세이지는 그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고아한 성가대의 합창 소리,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빳빳한 교복을 차려입은 학생들이 얼마 정도 서성이고 난 뒤 모든 절차가 끝이 났다. 세이지는 아무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캐모마일이고 루이보스고 죄다 도움이 되질 않는다. 어딜 가 세이지? 기숙사에 두고 온 게 있어. 먼저 교실에 가도록 해, K. 저를 붙잡는 동급생의 손길을 물리치고 세이지가 밖으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숙사에는 아무것도 없다. 호수를 조금 거닐어볼까?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진 여유시간이 있었다.

가끔은 마음을 놓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세이지는 의식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고 있었다. 예컨대 신입생들이 쉽게 들어오기 힘든 학교의 구석구석을 노리며 막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역시나 모든 일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눈앞에 누군가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나갔어도 아니, 걸음이 조금만 더 빨랐어도 부딪칠 뻔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세이지가 반걸음 물러났다. 상대도 갑자기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 안에 죽어버린 빛이 있었다.

 

 

세이지의 말문이 막혔다. 아, 실례했습니다. 뒤로 물러서며 흩어질 것 같은 사과를 받고도 세이지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추었다. 천천히 열리는 세이지의 입술 사이로 사과의 말 대신 작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도서관?”

 

아니, 아무것도. 이쪽이야말로 실례했어. 제멋대로 튀어나간 카나리아를 다시 양손에 가두며 세이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만난 소년, 킴벌리는 어쩐지 많이 변해버렸다. 그의 찬란하고 영롱했던 눈은 흡사 작은 어둠과 같이 사각 소리가 나는 모래와 같이 되었다. 세이지는 그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마도— 조금 아쉬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세이지의 것. 세이지가 밟고 있는 세인트 폴의 흙과 킴벌리가 밟고 있는 세인트 폴의 흙이 다르듯이 세이지 클라리는 그 특별함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자가 아니었다. 품속의 작은 카나리아가 하늘을 날았다.

 

“카나리아?”

 

세이지가 뒤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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