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은 2014년도에 발간한 동화 리메이크 테마의 앤솔로지 '동화해석론'에 백설공주로 참가했던 글의 수정본입니다.
이미 백설공주를 리메이크했던 1차 만화의 스핀오프 격으로 작업한 글이라 백설공주와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이 내내 마음이 쓰여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을 정리할 겸 인물명과 약간의 스토리 수정을 거친 점 안내드립니다.
Tip. 홀수 번호를 먼저 읽고 짝수 번호를 읽으면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엔 왜 이렇게 복잡한 글을 좋아했을까요? 뭐래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재정렬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D.C.
da capo per voi
1.
곰의 봄날은 잔인한 오후였다. 푸른 햇빛 사이로 비치는 꽃게의 세 치 혀도 나름 날렵했다. 숨이 차오르는 무료한 오후에 구름은 한 점 없었고 소녀는 부스럭 소리 내어 몸을 일으켰다. 창백한 얼굴 위로 햇살이 바스러지며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소녀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자 귓가에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아파? 아냐, 아프지 않아. 신음에 가까운 대답이 젖은 이불 속에서 메아리쳤다. 늦은 오후가 되도록 소녀를 부르는 사람 하나 없이 자고, 또 자고, 잠드는 하루가 계속 이어졌다.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 하얀 발가락이 차갑게 얼어붙고 두툼한 이불로도 가릴 수 없는 외로움, 고독. 붉은 소녀의 입술 사이로 흰 입김이 쏟아져 나왔다. 창밖엔 아직도 해가 밝아서 언제나 소녀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었다. 추워, 배고파, 아파, 아파아. 아무도 듣지 않는 안심 속 고해성사가 추운 날 입김만큼이나 허탈하게 흩어졌다.
2.
저녁 한때, 몇 시간이면 하르마는 떠난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불안함이 등을 타고 양쪽 귀까지 올라왔다. 두근두근, 맥박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진 것인지 귓속에만 가득 들어찬 것인지 알 길 없이 이미 마법사의 몸은 온통 심장이라도 된 듯이 펄떡이고 있었다.
잡아야 할까? 사시나무 떨듯 창백하게 떨리던 손끝이 멈춰 섰다. 삐걱대는 나무 테이블 위에 다 식어가는 찻잔이 고요하게 진동했다. 그 기묘한 움직임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마법사가 입술을 깊게 깨물었다. 명부가 없는 자의 죽음은 대체 누가 거둬가는 것인가. 마법사의 눈이 기괴하게 빛났다. 결국, 마법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난데없이 옆의 낡은 나무 테이블이 우지끈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비싼 찻잔이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비명을 삼키는 마법사 뒤로 찻잔이 깨지면서 두 사람이 바닥에 땀 흘려 새겨놓은 마법진이 균형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찻잔이 깨지는 소리보다도 더 날카로운 절규가 저 멀리서 들려오자 마법사는 감탄했다. 아아, 이런 방식으로 거둬가는구나. 어느새 사라진 비명만큼이나 절망에 가득한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허탈하게 가라앉았다. 하르마, 하르마! 대마법사라 칭송받던 철벽의 여인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무너져 있을 순 없었다. 마법사가 빨갛게 부은 눈가를 소매로 대충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딱 부딪치는 치아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하르마의 방으로 기어가듯 겨우 그 앞까지 도달한 마법사는 고지를 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차마 닫힌 문을 열 수 없었다. 아직 하르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절망, 두려움. 무서울 것 없던 대마법사에게 처음 찾아온 두려움은 그녀의 온몸을 잠식해 손끝까지 저릿해지고 온몸에 열이 뻗치는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파르르 떨리는 눈가 근육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야를 방해하자 마법사가 두 손으로 떨리는 눈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기 위해 주문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하르마가 이곳에 없더라도 들어가야만 한다. 마법사는 이 방을 정리할 의무가 있었다.
나의 하르마, 하르마!
마법사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절규하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문을 열었다.
“공주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을 타고 잿가루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맑은 목소리의 하르마는 단 두 줌의 가루가 되어 한 줌은 하늘로, 한 줌은 마법사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3.
찬바람이 부는 날씨 덕분에 거리엔 온통 따뜻한 차림의 사람들뿐 이었다. 꽃이 필는지 말는지 아슬아슬한 긴장이 맴도는 나뭇가지 위에 선명한 색의 새들이 앉아 변덕스럽게 포르르 날아가기도 하고 도란도란 짹짹거리기도 했으나, 희한하게도 무수한 꽃나무가 즐비한 낮은 언덕 위로는 단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았다. 벌써 달콤한 꽃향기가 나는 것이 무척 유혹적이었음에도 그 살벌한 유혹에 차마 다가가지 못한 것은 동물만의 원초적인 직감 때문이었으리라.
다행히 사람들은 동물의 움직임을 읽을 줄 알았으며 언덕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이질감을 감히 무시하는 자 또한 없었다. 자연스럽게 언덕은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육지 속 무인도가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시들어 죽는 나무 하나 없이 늘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꽃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자연의 신비라 치부하기엔 확실히 언덕엔 사람의 손이 탄 흔적이 있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간극에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의 수많은 이야기꾼이 나섰고, 덕분에 신비하고도 무서운 이 언덕에는 괴팍하고 잔인하며 세상 유일무이한 대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마치 전설처럼, 오랜 옛날이야기처럼 돌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옛날이야기의 내용은 신빙성이 있었다.
와르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물건이 넘어지는 소리, 어린아이의 짜증 섞인 날카로운 비명이 언덕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이답지 않은 한탄 조의 앓는 소리가 멈추고 무너진 물건 더미에서 불규칙하게 잔뜩 뻗친 흰머리의 소녀가 낑낑 빠져나오며 툴툴댔다.
“뭐람? 왜 또 어린애 차림이야? 정말이지 하늘 생각은 알 수가 없네……꺅!”
깡! 소녀 머리 위로 맑은소리를 내며 작은 돌이 떨어졌다. 옷에 잔뜩 묻은 먼지를 털어내다 말고 돌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정수리를 한 손으로 매만지던 소녀가 신경질적으로 천장을 올려보다 그대로 굳었다. 그러고 보니 왜 돌멩이가 떨어지는 거야? 소녀가 차마 답을 내리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차마 다 털어내지 못한 먼지 위로 다시 흙먼지가 잔뜩 덮치는 바람에 온몸이 잔뜩 더러워진 소녀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안에서 허탈하게 웃었다. 이게 몇천 년짜리 전통 있는 집인데. 기침하면서도 끊임없이 투덜거리던 소녀가 겨우 무너져 내린 잔해 위로 올라가 얇고 작은 두 손으로 바위들을 치웠다. 모두 마법으로 녹여버릴까 하는 유혹이 든 것도 잠시,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소녀가 가만히 잔해 위로 귀를 붙였다.
“……신음 아냐?”
살려줘.
선명한 목소리에 소녀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잔해더미 위에서 뛰어내렸다. 여자아이 목소리였어! 손가락을 입에 넣고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던 소녀가 기묘하게 눈매를 찌푸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감흥 없는 표정으로 잔해더미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몸과 함께 정신력도 어려진 모양이군. 천하의 대마법사께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라니. 속으로 투덜거리며 소녀가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모양대로 작은 잔해들이 춤을 추듯 공중에 휘날리더니 자연스럽게 한쪽 구석으로 밀려났다. 소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휘파람을 불며 마치 원숙한 지휘자처럼 양손을 흔들고 휘어잡았다. 이미 정해진 선율을 따라가듯 움직이는 모양이 자연스러웠다.
들리지 않는 선율이 눈앞에서 무너진 잔해를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소녀의 손짓 하나에 구멍 뚫린 천장 위로 크고 작은 잔해들이 밀려 올라가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가고 뿌옇게 집안을 가득 메운 흙먼지마저 마지막 주문을 끝으로 흩어졌다.
“피네!”
지휘를 마치듯 손을 끌어올려 휘어잡으며 한 바퀴 돌고 나니 집안이 완전히 정리됐다. 소녀가 후련한 표정으로 가볍게 잔해더미가 있던 곳으로 다가가자 바닥에는 빛나는 금발을 가진 소녀가 누워있었다.
4.
“이해가 가지 않는 거, 이해해. 얼마든지! 하지만 지금은 시급하단 말이야.”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창밖을 바라보던 검은 머리의 청년이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무시에 여인이 입술을 콱 깨물고 벌떡 일어나 청년에게 고함치려는 순간, 쉬이. 청년이 검지로 제 입술을 지그시 눌러 제지했다.
“억지가 심하시군요. 일단 진정하시길 바랍니다, 공주.” 입가에 매달린 옅은 미소가 비수라도 된 듯, 아직도 이번 대의 백설 공주인 대마법사가 얼굴을 붉히며 청년을 노려보았다. 마법사의 침묵 덕에 소리가 줄어든 공간의 고요함과는 다르게 찻잔이 점차 격렬하게 진동하자 청년이 마법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냉정함을 잃은 대마법사의 기를 완전히 눌러버린 청년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찻잔을 눈앞으로 가져가자 마법사가 동요한듯 눈가를 잘게 떨었다. 그런 마법사의 모습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태연하게 소리까지 내며 울리는 잔의 몸통을 청년이 검지 끝으로 쓸어내렸다.
“찻잔이 울리고 있군요. 당신의 저주에 걸리는 건 사양입니다.”
이쯤되니 마법사는 거의 안쓰러워 보였다. 초조함에 창백해진 마법사의 뺨과 어떻게든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꽉 깨물고 있는 입술까지. 하관이 완전히 굳어 차마 어떠한 말도 뱉지 못한채 떨리는 마법사의 입술을 가만히 주시하던 청년이 천천히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니까, 공주님. 진정하시라고 했잖습니까. 언뜻 느끼기 힘들 정도로 청년의 말 속 옅게 감도는 즐거움을 간파해낸 마법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야 들었지만, 정말 악질이구나! 공작, 네놈이 대마법사를 농락하고도 그 목숨 부지할 성 싶으냐?”
“부지 못한다면.” 공작의 붉은 눈이 소름 끼치도록 빛났다. “……당신의 목숨은 평생 부지할 수밖에 없겠죠, 백설공주.”
짧게 감탄하며 아직도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코에 가져간 공작, 레드럼이 한차례 깊이 차 향기를 맡았다. 어느새 진동이 멈춘 찻잔을 쓸어주며 레드럼이 이제야 한 입 목구멍 뒤로 찻물을 삼키자 차갑게 눈이 가라앉은 마법사가 도로 소파 위에 앉았다. 마법사는 이미 주도권이 레드럼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부탁이라한들 유일무이한 대마법사의 부탁. 언제든지 부탁이 아닌 강제, 강요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대마법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이 역시 유일무이하기 때문이었다. 기나긴 세월 속에 어떤 이유로든 주도권을 뺏겨본적이 이 마법사에게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마법사는 을이 되는 방법을 잘 몰랐다.
“끝나지 않는 삶은 어떠십니까.” 처음으로 레드럼이 자리에 앉았다.
“끝내줄 생각이 없다면 함부로 입 놀리지 마. 어차피 안 된다면 굳이 널 살려둘 생각도 없단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럴 수 없는 이유 또한 간단했다.
“저런, 제 연인이 많이 슬퍼하겠군요.” 레드럼이 한쪽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찻잎이 두 장 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이 감흥 없이 덤덤한 어조로 말하는 레드럼의 태도에 기어코 마법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포효했다.
“젠장, 젠장! 저런 육시 할 개새끼! 하르마가 왜 너 같은걸, 너 같은걸! 대체 왜! 제기랄!”
절규에 가까운 포효가 끝나자마자, 레드럼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맑은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깨졌다. 레드럼의 옷과 바닥에 잔뜩 쏟아지는 도자기 조각과 찻물 위로 뚝, 뚝, 이질적인 것이 떨어졌다. 그것을 눈치챈 레드럼이 뒤늦게 잔을 쥐고 있던 손을 자연스럽게 살펴보자, 폭발의 충격으로 잔뜩 난도질당한 손가락에서 빨간 피가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잘 다듬어놓은 보라색 손톱이 군데군데 벗겨져 본연의 뽀얀 손톱 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 레드럼이 짧게 혀를 차며 마법사의 눈을 바라봤다.
“공주님, 당신 하리가 떠난 이후로 자제력이…….”
“젠장 빌어먹을 자식, 원하는 게 뭐야! 네게 나쁜 조건도 아니잖아!”
글러 먹었군, 완전히 눈이 뒤집힌 마법사를 가만히 주시하던 레드럼이 천천히 뭔가를 고민하듯 시선을 낮추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직도 손가락에서 솟아나는 핏방울을 반대쪽 검지로 가볍게 훔쳐낸 레드럼이 그대로 죽 빼놓은 혀로 단번에 핥아 올린 뒤 중얼거렸다.
“원하는 것은…….”
레드럼이 마법사의 눈을 주시했다. “없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거대한 감정의 홍수 같은 건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냉정하게 가라앉은 마법사의 눈동자 안에 레드럼이 가득 담겼다. 마법사가 레드럼을 주시하며 완전히 자리에 앉을 동안 옷이 바스러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절대 정적 속에서 가죽이 눌리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게다가 원하는 것도 없다. 상당히 공작답지 않은 말이야. 그렇지?” 비죽 올라간 마법사의 입꼬리가 차갑게 굳어있었다. 레드럼이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마법사의 눈만 바라보고 있자 마법사가 화사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펼쳤다. 자연스럽게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찻잔 속을 주시하자,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에 밀리듯이 찻물이 솟아났다. 마법사가 그대로 공중에 띄우듯이 찻잔을 밀어내자 찻잔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레드럼 앞까지 날아가 테이블 위에 살포시 놓였다.
“네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저주 같은 건 걸려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아.”
마법사가 무릎 위에 양손을 가지런하게 올리며 어린아이 달래듯 조곤조곤 말했다.
“그렇지만, 아기 공작님.” 눈 한 번 깜박이기에도 모자랄 만큼 짧은 순간. 마법사의 숨결이 레드럼의 귓가에 닿아 있었다. 가벼운 여인의 몸무게가 레드럼의 전신을 짓눌렀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사소한 선택 하나조차 목적 없인 행하지도 않는 더러운 박쥐 주제에 지금 누굴 협박하는 게냐?”
네 이 가는 목을, 마법사의 가는 손가락이 레드럼의 목을 감았다.
“부숴버릴 수도 있단다.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구나. 자식 잃은 어머니는 무섭다는 말 어디서 들어보지 못했니? 안쓰럽게도.”
가벼운 몸이었으나, 떨쳐낼 수 없는 무게가 레드럼을 옭아맸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에 따라 깨달은 순간, 오랫동안 닫혀있던 레드럼의 입이 그제야 열렸다.
“다른 한 가지.”
레드럼의 볼을 쓰다듬던 마법사의 손이 멈춰 섰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레드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목숨이 백설공주 손톱 끝에 달려있던 자치고는 꽤 평온한 목소리였다.
5.
“왜 마녀님 집에는 찻잔이 없어?”
마법사는 긴 금빛 머리를 땋다 말고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의 양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정면을 바라보자 고풍스러운 거울 속에 두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던 마법사가 고민하듯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앉아있는 소녀의 머리에 잔뜩 볼을 비벼댔다. 얼핏 곤란해 보였으나, 실상 마법사의 머릿속에는 ‘이 어렵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어린 소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 가지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의아한 듯 자신을 올려보는 소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한 마법사가 땋던 머리를 소녀 어깨너머로 넘겨주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턱을 매만지던 마법사가 결심한 듯 입을 앙다물고 창가 아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서 소녀 옆에 앉았다.
“내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돼. 하르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대마법사잖니.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갑자기 화가 나서 애먼 사람에게 불길을 쏟아버릴 수도 있다는 거야.”
“마녀님 그러지 않잖아.” 하르마가 자신의 금빛 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 꼬며 투덜댔다. 맞아, 난 그렇지 않아. 달래듯이 사근사근하게 속삭이던 마법사가 의자 위에 한쪽 발을 올리더니 무릎 위에 볼을 기대며 덤덤하게 설명했다.
“어쨌든 그렇게 내가 화가 난 나머지 불덩이를 던진다면 그 불길이 손쉽게 마을을, 숲을, 사랑을 덮어 없앨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내 기분 하나로 무언가 사라질 수 있다는 거지.”
하르마가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볼만 부풀리자 마법사가 숨을 깊이 내쉬며 하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내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빠서야 자기들을 홀랑 태워버릴지 누가 알겠어?”
마녀님은 태우지 않잖아. 그래, 옳단다. 옳아. 네 말이 옳아. 마법사의 손길에 간지러운지 눈가를 찡긋거리는 하르마의 볼을 가만히 쓸어주던 마법사가 작게 키득거렸다.
“네 말대로 난 태우지 않아. 그러니까 그들은 내가 태우는지 태우지 않는지 그런 것엔 전혀 관심도 없지. 내가 태울 수 있는가만 중요한 거야. 그렇게 멍청하단다. 그래서 나온 거라곤 바보 같은 찻잔밖에 없는데 말이야.”
몸을 일으킨 마법사가 손을 두어 번 휘젓자 마법사의 손바닥 위에 동그란 플라스크처럼 생긴 병이 생겼다. 그 병에 입김을 불어넣으니 금세 따뜻한 찻물이 차올라, 그것이 반쯤 차오르자 마법사가 병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으며 하르마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걸린 제약이 바로 ‘찻잔’이지. 내 기분이 위험한 상태에 이르면 찻잔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만든 거야. 예를 들어 내가 무지막지하게 화가 나면 찻잔이 반응해서 떨리거나, 금이 가거나, 깨질 수 있도록 제약을 걸어서 언제 어디서든 찻잔만 있으면 내 상태를 알 수 있게끔 말이야.”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르마가 드디어 이해했는지 방긋 웃었다. “마녀님이 찻잔을 다 깨뜨려서 찻잔이 없는 거구나! 그렇지?”
“아니야, 하르마. 내겐 찻잔이 필요 없기 때문이야.”
6.
저택에 가까스로 도착한 마법사의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부여잡고 가볍게 불꽃을 일으킨 마법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래, 나는 대마법사다. 못할 것도 없어. 써본 적도, 써보겠다 생각한 적도 단 한 번 없던 마법이건만, 쓰겠다고 마음먹자마자 머릿속에 단번에 그려지는 화려한 수식과 정돈된 배열, 논리적이고 이상적인 구현에 마법사가 허탈하게 웃었다. 이미 현명하고 지혜로운 대마법사는 죽었다. 바늘구멍만 한 가능성에 매달려 단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마법수식을 짜고 있는 모습이라니! 차마 침대 방까지 걸음을 옮기지도 못한 마법사는 벽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바들바들 떨리는 마법사의 손가락 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하르마. 난 이렇게라도 너를 다시 보고 싶어.”
발갛게 부은 눈가를 훔쳐내고 흥건하게 달라붙은 눈물을 탈탈 털어낸 마법사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치지 않는 눈물이 턱을 타고 끊임없이 흘렀지만, 별다른 수 없이 마법사는 서재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차라리 이런 방법보단 억지로라도 레드럼의 손에 죽는 게 훨씬 낫지 않았을까? 뒤늦게 든 생각이었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서재에 도착한 마법사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실이라도 달렸는지 악기를 연주하듯 화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꽂혀있던 수많은 책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공중에서 겹치지 않게 늘어진 책들이 저절로 페이지를 넘기며 한참을 소란스럽게 날아다니다가 몇 개의 책들은 도로 책장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책상 위로 쌓이거나 공중에 뜬 그대로 한쪽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책과 마법사의 주변으로 모여든 책들의 공통점은 모두 마법의 기술을 다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내용에 시간 여행이 있다는 점이었다.
영생을 사는 대마법사에게 시간 여행은 큰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제약에 걸려 있기에 시도도 하지 않았지만, 시도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느냐면, 긴긴 세월 동안 시간 여행의 실행 법도, 조건도 그 모든 것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다. 찾는 법을 몰라서 안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지금 마법사의 옆에는 서른 권도 넘는 마법 서적들이 쌓여 있었다. 모두 시간 여행에 관한 책이었다.
오래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다. 책은 단순히 이미 세워진 공식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 환상에 기초한 시간 여행. 애석하게도 마법사가 하르마의 시간을 잡아두었던 방법과 유사했다. 그 부작용은 이미 밝혀졌다시피 마법의 실패. 하르마의 경우 마법이 실패하며 시간이 흘러가고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마법사의 경우는 다르다. 돌아갈 곳도 흘러갈 시간도 없다. 영생을 사는 대마법사에게 시간이란 뭉쳐진 공과 같아서 어느 시간대로 걸어가도 똑같은 거리, 똑같은 풍경, 똑같은 모습만이 비추어질 뿐이었다. 굳이 이런 위험이 아니더라도, 보통 이런 식의 마법은 환상에 기초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혼자서 시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환상이 깨지 않기 위해선 환상을 속삭여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유일무이한 대마법사에게 환상을 속삭여줄 사람 따윈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환상을 속삭이며 환상임을 알아차리지 못해야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물론 이 또한 마법사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평소의 마법사였다면 말이다.
이미 공식을 확신한 마법사가 굳이 서재까지 달려와 책이란 책들은 다 뒤적였던 것은 방법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다. 실패를 찾기 위함이었다. 아직도 떨리고 있는 손끝. 쉽게 가라앉지 않는 감정.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알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위험요소였다.
아, 그 누가 찻잔이 필요 없다고 말했는가.
마법사는 입술을 깨물고 마지막 책을 덮어버렸다.
7.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그러는 거야?”
마법사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르마를 올려보았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하르마는 잔뜩 긴장해 떨리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마법사를 설득했다.
“다른 건 그렇게 현명하면서, 유독 이것만 바보 같아요. 공주님, 날 봐요. 이제 어린애 말투는 그만둘 거예요.”
하르마가 정말 아가씨같이 화사하게 웃는 것을 가만히 주시하던 마법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보던 책을 기어코 덮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글쎄, 내가 생각하기엔 그것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마법사의 말에 하르마가 순간 눈가를 떨었다. 그 모습에 마법사가 소리 없이 웃으며 자세를 바꿔 하르마 쪽으로 턱을 괴고 몸을 기울였다.
“레드럼 공작이 그렇게 좋아? 넌 굳이 말을 높이지 않아도 기품 있기 때문에 괜찮아. 네가 누구랑 자랐는데? 그런 못 배운 티 나는 귀족 아가씨완 차원이 다르대도. 오히려 네 쪽이 훨씬 여유 있고 자연스러워.”
무엇보다 네 뒤엔 내가 있기 때문에 그 속 시커먼 놈도 널 택할 수밖엔 없지.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말은 속으로 삼키며 마법사가 하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이 하르마의 고운 금발에 닿기도 전에, 하르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법사의 손을 밀어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렇게 할 거예요.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아요? 당신을 공주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날 말이에요!” 다소곳하게 미소 짓는 하르마를 보며 마법사는 영원히 오지 않길 바랐던 날이 기어코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존재해선 안 되는 소녀의 성장. 어느 날, 하늘에서 병들었던 소녀가 뚝 떨어졌던 그 첫 순간부터 마법사는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소녀는 다시 돌아가게 되리란 것을. 제약 탓에 시간을 건드릴 수 없는 대마법사가 소녀를 붙잡을 수 있는 방식은 얼핏 없어 보였으나, 현명한 이번 대의 백설공주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시간을 농락해왔다. 어린 시절로 묶어 놓은 소녀의 시계는 사춘기와 같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미 그러리라는 것도 이 지혜로운 대마법사인 백설공주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르마는 이길 수가 없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등받이에 등을 기댄 마법사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 어떠한 악의도 없는 순수한 미소임에도 어쩐지 하르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조건! 앞으로 마법 공부 열심히 할 것. 그 첫걸음으로 오늘은 저택 구석구석에 마법진부터 그려볼까? 내가 도와줄 테니까 여태껏 배운 지식을 총동원하는 거야.”
훗날 네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공주님이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8.
말도 안 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하르마가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방금까지 마지막을 준비하며 마법사에게 줄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그 와중 느닷없이 느낀 극심한 두통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빠르고 굵게 지나간 그 통증으로 인해 가빠진 호흡이 아직도 거칠고 흐른 식은땀이 차마 마르지도 않았건만, 믿을 수 없게도 이곳은 기억도 흐릿한 어린 시절 그녀의 집이었다. 꽤 커다랬던 창문은 평범하게 먼지 쌓여 있었고, 소녀가 누워 종일 앓아도 넓은 세계였던 침대는 어느새 누워 있기에도 답답할 정도로 작아졌다. 아니, 그런 것보다 하르마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하르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바닥의 나무판자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도착한 창문 앞에서 하르마는 그대로 양쪽 창문을 벌컥 열었다. 창문에 막혀 차마 들어오지 못했던 바람이 일순간 몰려들어 하르마의 금발이 잔뜩 흩날렸다.
“……아프지 않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질적인 풍경에 하르마의 마음이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이곳은 하르마가 살아온 곳도, 살았던 곳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변했다. 그녀가 없던 10년 동안 낡은 골목은 숨을 쉬고 뼈마디가 자라나 이전의 흔적이나마 찾기 위해 하르마는 한참이나 창밖을 지켜서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작은 탐험도 끝이 났다. 앞뒤로 들려오는 비명에 하르마가 더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의 근원지 중 하나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맞은 편 다락방 창문에서 어떤 사내가 하르마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내 모습이 어딘가 이상한가? 제 모습을 내려다보던 하르마가 나머지 소리의 근원지도 기어코 알아냈다. 등 뒤엔 집안사람밖엔 있을 수 없었다.
“엄마, 아빠.” 다녀왔습니다. 하르마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10년이 넘어서야 그들은 그들의 딸에게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모두가 기적의 이야기라고 칭송하였다.
9.
또 악몽이다. 하르마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베개를 감싸 안았다. 아니, 이것은 눈물이었다. 눈이 아릿할 때까지 흐른 눈물에 베개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무슨 서러운 꿈을 꾸었는지 벌써 잊어버렸지만, 왠지 발끝이 시린 것 같아 하르마는 잔뜩 몸을 웅크리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사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요새 들어 자주 꾸는 이 악몽은 자신이 공주님의 곁으로 오기 전, 매일 매일을 침대에서 지내던 때의 꿈이었다. 언제 치료될지 모르는 이름 모를 병. 날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소녀는 다섯 번째 생일 이후로는 치료약도 아닌 진통제 따위를 위해 부모님을 밤낮 가리지 않고 밖으로 내몰아야 했다. 그러나 그 진귀한 약의 값은 집을 통째로 갈아 넣어도 부족했기에 부모의 희생이 덧없게도 소녀가 약의 정량을 먹을 수 있는 날은 극히 드물었으며, 소녀는 늘 아파했다. 잠으로 고통을 잊고자 온종일 잠을 청했지만, 결국 못 이겨 베개고 이불이고 죄다 젖을 때까지 기다리면 어느새 햇빛은 사라지고 서늘한 밤이 찾아왔다. 종일 기다린 독한 약을 삼키고 나면 어김없이 몽롱한 정신 너머 환청이 들려오곤 했다.
“많이 아파?”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르마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놀란 하르마의 모습에 더 놀랐는지 어두운 인영, 마법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르마를 바라보았다. 아직 상황 이해가 안 되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초점 없는 눈으로 마법사를 내려 보는 하르마의 모습이 확실히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네가 떨고 있어서 어디 아픈 줄 알고 그랬어. 지금 보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하르마,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괜찮으니까 말해봐. 일단 진정하고 앉자.”
마법사의 다정한 속삭임에도 하르마는 가만히 마법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오랜 시간 대마법사의 곁에 지내며 그 마법을 나눠 받고, 그 현명함을 배워가고 그 지혜를 계승하던 과정 중 원치 않게 생겨난 능력임이 틀림없었다. 이미 하르마는 저택 곳곳에 그려진 마법진의 역할을 확신하고 있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하르마는 밝게 미소 지었다. 공주님, 당신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이제 곧 돌아갈 것 같아요, 공주님.”
10.
꽃 비가 날리는 봄날 하늘이 따뜻하게 햇살을 내리고 지저귀는 새들이 도란도란 뭉쳤다가 풀어졌다가, 마치 어린 소녀처럼 재잘댔다. 잔잔히 흘러가는 구름은 얼핏 분홍색으로 보여 나뭇가지에 걸리는 것이 꼭 솜사탕 같다며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도 웃었다. 정성 들여 짜낸 비단 같이 흔들리는 풀잎, 그 아름다운 여유와 향기 속에 어린아이 하나와 이젠 다 커버린 아이 하나, 두 사람이 새처럼 웃었다. 금빛 긴 머리가 바람에 얼굴을 덮자 그것마저 우습다며 깔깔대며 모자를 감싼 리본을 풀어 곱게 하나로 묶어주는 손길 하나에 행복이 담겨 있었다.
“마녀님이 아끼는 모자잖아.”
“널 더 아끼니까 괜찮아.”
이래도 괜찮아? 괜찮아.
모두 괜찮다며 웃는 아이의 미소 하나에 사랑이 담겨 있었다. 다 커버린 아이는 고운 드레스에 잔뜩 풀물이 든 것을 대충 털어내고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도는 금빛의 아이가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 도자기처럼 창백한 피부 위에 기어코 고운 홍조가 떠오르자 다 커버린 아이는 저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마녀님, 울어?” 마냥 기뻐하던 금빛의 아이가 걱정하는 얼굴로 다 커버린 아이를 가만히 내려 보았다.
눈이 시렸던 걸까? “……아니, 모르겠어.”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가만히 올려 보던 다 커버린 아이의 피부가 창백해져 금빛의 아이보다도 더 하얘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커졌어, 공주님? 어른 같아요!”
환상은 깨졌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