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대로 길을 잃은 거라고.
*
아버지, 저는 가끔 꿈을 꿔요. 벌거벗은 아버지가 벽에 달라붙어 점점 말라가는 꿈이에요. 저 멀리서 봤을 때 아버진 땅에 다리를 붙이고 있었는데 제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계속 높이 올라가 버려요. 그래서 기어코 제가 벽에 도착하고 나면 아버진 이미 저 높은 곳에 매달려서 제 손으론 내려드릴 수 없게 되죠. 저는 괴로워하다 결국, 다시 멀리 가버려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꾸자꾸 가버려요. 제가 어디로 가든 아버지는 저를 쳐다보셨어요. 아버지의 마른 눈이 저를 쳐다봤어요. 그냥 제가 고개를 돌리면 됐을 텐데 희한하게 저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어요. 꿈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계속 아버지와 눈을 맞추고 더 멀리, 멀리 달아나는데 통통하게 살이 올랐던 제 다리에서 자꾸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보니까 제 다리가 아버지처럼 말라 있었죠. 저는 소리 질렀어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그럼 저는 꿈속에서 깨달아요. 아버지의 벌린 입이 말라 굳은 피부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라 말라가는 고통 속에 비명 지르던 것이라고. 아버지, 저는 가끔 꿈을 꿔요. 시선만으로 제가 말라죽는 꿈을 꿔요. 비명이 들리지 않는 꿈을 꿔요.
*
오늘은 정기 휴일이에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매섭다. 모닉 클레망은 그렇게 생각했다. 벌써 다섯 군데 째 문이 닫혀있다. 모닉이 한숨을 삼키며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일부러 가게 문을 일찍 닫고 나온 보람이 없다. 마지막으로 한군데만 더 돌아볼까? 주변을 돌아보다 문득 시간을 떠올렸다. 슬슬 집에 가지 않으면 위험한 시간이다. 모닉 클레망의 시선이 무거워졌다. 모닉이 검은 백팩을 바로 메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냥 오는 길에 들러볼 생각이었으니까, 상관없어. 상관없어. 매일 같이 흥얼거리는 노래 제목이다. 오늘은 엔조 클레망의 생일이었다. 엔조 클레망이 좋아하던 꽃, 좋아하던 노래, 좋아하던 사람, 싫어하던 꽃, 향기, 감정. 간혹 그런 것들을 모아 엔조 클레망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을 말하던 엔조 클레망은 늘 위태로웠다. 바람이 조금만 잘못 불어도 금세 추락해버리는 난간 위 나뭇잎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었다. 모닉은 날 이해할 수 있어? 안개에 파묻힌 모닉 클레망은 가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 속에 파묻힌다. 잠겨 갇혀버린다. 엔조 클레망의 물음에 모닉 클레망은 바로 답한 적이 없다. 늘 대답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안아주거나. 엔조 클레망이 안아줄 때 가장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론 늘 안아주었다.
"모닉, 우린 버림받은 게 아닐까?"
엔조 클레망의 20번째 생일, 겨울밤. 한쪽 뺨이 빨갛게 퉁퉁 부은 엔조 클레망이 모닉 클레망의 문을 똑똑 두드리던 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옅은 갈색 머리가 길게 자라 뺨에 달라붙은 형색이 영 지저분해 모닉이 눈 묻은 엔조의 뺨을 조심스레 털어주었다. 엔조의 빨간 뺨은 비단 맞은 흔적 때문만은 아닌 듯싶었다. 양 뺨이 모두 붉게 물들어있었다. 모닉의 거친 양손이 엔조의 두 뺨 위로 올라갔다. 꽁꽁 얼었어. 이것은 회피. 모닉의 팔이 엔조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일단 들어와. 이것은 포옹. 곧 깨질 것 같은 엔조의 눈동자 속에 모닉이 있다. 그마저 오래 담지 못하고 엔조 클레망은 눈을 닫아버렸다. 엔조 클레망의 세계는 어느 순간부터 항상 굳게 열리지 못하고 휘어질 듯 닫혔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엔조 클레망의 18번째 생일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모닉의 기억은 그 무렵 완전하지 못했다. 뜨겁게 끓어오른 물속으로 검고 쓴 것이 퍼져갔다. 엔조 클레망은 쓴 것을 마시지 못했다.
"저녁은."
"……."
"안 먹었구나."
전자레인지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옅게 우러난 커피가 담긴 잔을 들고 모닉이 전자레인지 문을 열었다. 미리 넣어둔 인스턴트 수프가 그릇 속에서 김을 뿜었다. 아버지는 사람을 굶기고 내놓는 버릇이 있으시지. 그릇을 빼내자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엔조가 앉아있던 식탁 위에 그릇과 스푼을 곧게 내려놓은 모닉이 벽에 기대서서 커피잔을 기울였다.
"일단 그것부터 먹어. 얘기는 그 뒤에 하자."
엔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없어? 새끼가, 닥치고 먹어. 그제야 모닉 클레망이 좋아하는 침묵이 집안에 흘렀다. 창밖으론 흰 눈이 흩날리듯 내려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축축하고 눅눅하다. 안개가 가득한 이곳에선 눈도 비도 찾기 어렵다. 그래서 모닉은 저 하얀 것들이 눈이 아니라 어떤 거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뚝뚝 떨어지는 거품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과 닿아 녹아내린다. 그편이 더 로망인 것 같았다. 모닉이 따뜻하게 쥐고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고 쌉싸래하다. 모닉 클레망은 커피를 싫어했다. 커피, 차, 초콜릿, 하여튼 카페인이 든 어떤 음식이라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 없이도 충분히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보내야 할 밤이 길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평온한 날일지라도 그것을 내어줄 만큼 엔조 클레망은 모닉 클레망에게 큰 자리였다. 훌훌 한 수프를 빨리 삼키지 못하고 한입씩 느리게 씹는 엔조를 바라보던 모닉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왜 쫓겨났어?"
"다 먹고 얘기하자며."
"너 먹는 거 구경하다 잠들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나 여자친구 생겼어."
싫어하는 침묵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닉은 이날 처음 알았다. 모닉 클레망이 싫어하는 침묵 끝에 엔조 클레망이 부서질 듯 웃었다. 미소 지어 벌어진 입에서 아픈 말이 툭 쏟아졌다. 그러니까 아픈 말이 뭐였느냐면. 어떤 말이 아팠냐면, 엔조, 사랑하는 내 동생이 뭐라고 했느냐면.
─정기 휴일입니다.
마지막 가게마저 모닉을 버렸다. 안개가 더 서늘해지는 것 같아 모닉은 급히 걸음을 옮겼다.
*
왜 항상 죽음을 떠올리느냐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삶은 늘 떠올리고 있잖아요. 그냥, 죽음은 삶이 아녀서 떠올릴 때마다 보일 뿐이에요. 죽음의 반대는 삶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난 항상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어요.
*
일찍 가게 문을 열고 난 뒤 점심때가 지나도록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날이었다. 주변에 행사가 있었던가? 아무리 행사가 있다 한들 모든 인파가 제 가게에서 꽃다발을 해가는 게 아니고선 이렇게 바쁠 수가 없다. 손님이 많다는 게 장사하는 입장으로서 나쁠 리야 없지마는 이쯤 되니 되지도 않는 의심을 하기 마련이다. 혹시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서 영업정지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작업대 옆에 올려둔 스마트폰에서 짧게 벨 소리가 울렸다. 모닉 답지 않게 두어 번 벨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꽃다발 예약 전화였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모닉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좁은 가게 안은 손님으로 가득 차 시끌벅적했다. ─왜, 일전에 그 보복살인 말이야. 꽃의 줄기를 잘라내던 모닉이 손을 멈췄다. 잊었던 필립의 목소리가 제 귓가를 스쳤다. 우연히도 모닉의 손에 들려있는 장미가 어쩐지 모닉에겐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뻔하지. 다 돈 때문이야, 돈. 봉긋하게 여러 겹의 꽃잎을 감춘 붉은 장미가 비웃었다. 모닉 클레망, 너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렇지? 모닉이 시끄러운 장미를 안개꽃 사이에 가두었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봅니다." 모닉이 완성된 꽃다발을 손님에게 내밀었다.
어머나 예뻐라. 꽃에 코를 파묻고 한껏 냄새를 들이쉬던 손님이 잘게 웃었다. "우린 이미 안갯속에 있는데 안개꽃이라니! 예쁘긴 한데 기분이 이상하네."
다음에 또 올게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손님 하나가 떠나갔다. 여전히 가게에 가득한 손님을 둘러보며 모닉은 묵묵히 꽃 몇 송이를 뽑아 작업대 위로 가져갔다. 직업에 집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오늘 모닉 클레망에겐 집중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잠시 조용한가 싶더니 젊은 여자아이 둘이 재잘거렸다.
"그러고 보니 안개를 떠받드는 사람도 있대. 들어봤어?"
"안개를?"
사람의 혀는 왜 그리도 긴지.
"안개는 신의 요람이라 거기에 섞이지 못하고 안개를 벗어나면 죽는대."
왠지 무섭다. 붉게 입술을 채운 여자아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모닉은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모든 것은 두려움을 딛고 선다. 어떤 종교도, 신념도, 직업도, 생활도 모두 무너지는 것과 벗어나는 것의 두려움을 딛고 서 있다. 모닉에겐 더욱 그러했다. 흔들리고 꺾여 매달리더라도 놓쳐 구르기 일쑤인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할 곳이 필요했다. 유일한 의탁 처는 오래전 사라져 이제 안갯속에 홀로 남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모닉 클레망의 두려움은 외로움이었다. 그렇기에 어젯밤 모닉의 집 앞에 공연히 서 있던 빛 또한 모닉에겐 두려움이었다. 밝고, 빛나고, 하얀 자. ─신께서 이곳에 있으라 하셨거든요. 붉은 꽃이 작업대 위에 후두둑 떨어졌다. 재잘대던 여자아이들이 모닉을 향해 돌아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피가! 여자아이가 급히 내민 손수건을 거절하고 모닉이 한 손으로 응급키트를 꺼내왔다. 대체 얼마나 오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벌써 다 다듬은 꽃이 한 더미였다. 10만 원짜리 꽃다발을 세 갠 만들 수 있겠군. 실없는 생각이었다. 모닉이 키트를 열고 흐르는 물에 상처 난 손을 씻어냈다. 거의 흐르다시피 했던 피가 맑은 물에 섞여 옅게 퍼져나갔다. 모닉 클레망은 이런 물을 본 적이 있다. 맑은 물 안에 옅게 퍼져 조금씩 그 농도를 더해가는 비린 피의 향기를 맡은 적이 있다. 손을 거즈와 손가락 골무로 단단히 고정하고 나서 모닉은 목장갑을 손에 끼웠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서 더 크게 만들어드렸습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손님맞이가 조금씩 끝나갔다. 그 속에서 모닉 클레망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
너는 죄를 받고, 나는 죄를 지었어. 우리 둘 다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은 거야.
최대량은 유지해주세요. 조절하는 건 줄이면 되니까.
이것은 무시.
미아
Monique cl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