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배려가 없지. 그의 배려는 곧 죽음을 뜻하거든. 그래, 그 녀석은 불타버렸어.
My dear brother.
With Euan Wales.
세이지 클라리가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 그의 큰 형 캐모마일 클레리는 제법 작은 크기의 여행용 가방에 혼자 짐을 꾸역꾸역 욱여넣고 있었다. 도와줄까? 갓 승마를 마치고 온 막냇동생의 귀여운 선의를 가볍게 거절하며 가방을 가까스로 잠근 캐모마일이 그 위에 풀썩 앉았다.
“세이지, 네 얼굴도 당분간 못 보겠군.” 편지하면 답장은 꼭 해줘야 해. 네 글씨가 점점 예뻐지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런 이상한 말 안 해도 할 거야. 덤덤한 표정의 세이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막 9살이 된 아이의 말치곤 지나치게 가라앉은 것이 안쓰러웠는지 캐모마일의 얼굴 위로 일순간 쓰라림이 스쳐 지나갔다. 세이지 클라리는 아주 가끔 보이는 그런 얼굴을 견딜 수 없었다. 캐모마일은 타고나기를 강자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자신의 강함으로 약자를 짓누르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타고난 부자가 걸인과 같아질 수 없듯이, 타고난 왕이 노예와 같아질 수 없듯이 그가 세이지를 대하는 태도는 늘 강자가 선의를 베푸는 상·하의 그것이었다. 비단 그것이 세이지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열여섯의 캐모마일 클레리 위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또래 아이, 선배, 선생님, 심지어 그의 부모조차 그에겐 사자 그림자 속 작은 토끼 한 마리였을 뿐이었다. 세이지는 그 토끼 중에서도 더욱 작고 약해 보이는 토끼였으리라. 다행히 사자는 마음씨가 넓었기 때문에 제 그림자 아래에 있는 작은 동물들은 건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이지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이 품고 있는 그 오만의 상징이 당신만큼 자라 그 뱃가죽을 찌른다면 어떡할까? 그러나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조심히 다녀와.”
“오냐.”
열여섯 살의 캐모마일 클레리가 세인트 폴 남학교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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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클레리는 모든 것에 착실한 남자였다. 그는 교우관계에 착실했으며 학업에 착실했고 가정에 충실했다. 도련님들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세인트 폴에 입학한 뒤 상위 0.1%의 성적을 놓친 적이 없었고 소년들의 선망 대상이었으며 한 달에 두 번씩은 그의 막냇동생에게―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에게도 편지를 보내왔다. 게다가 두껍기로 유명한 세인트 폴의 철문을 여는 것도 마다치 않고 꼭 일 년에 한 번씩은 저택에 찾아와 사용인들과 가족, 친지들의 얼굴을 보고 동생들을 보살피기까지 했다. 만약 클레리 가문이 후작반열에 들게 된다면 필시 캐모마일 클레리의 손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절대적일 정도로 그는 신뢰를 품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세상에서 그를 가장 증오하고 사랑하는 그의 막냇동생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이지 클라리는 채 2주가 지나기도 전에 한 번씩 꼭 날아오는 편지를 천천히 훑으며 결국 웃고 말았다. 편지 속 캐모마일은 ―그것이 어린 막냇동생을 위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제법 유쾌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귀족 가의 자제라지만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특히 더 밖에 나가버릇하지 않는 세이지에게 바깥세상이 어떠한지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기 위한 캐모마일의 편지는 주로 학교의 풍경, 주변의 일화 등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중에서도 꽤 자주 나오는 이름이 있었다면 케인, 케인 웨일스였다. 캐모마일은 그를 이렇게 정의했다.
“재수 없는 녀석이지. 난 딱히 상관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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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의 세이지 클라리가 세인트 폴 남학교에 입학한 지 일 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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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8년 전의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음에도 캐모마일의 편지는 끝나지 않았다. 이미 머리가 자라 ‘형의 얼굴이 보고 싶어.’라는 답장도 하지 않는 세이지에게 ‘꾸준히’라고 해도 좋을 만큼 캐모마일은 편지를 보내왔다.
“참 대단한 형님이야.”
곧 학년이 바뀌어 헤어질지도 모르는 룸메이트가 한 상자 가득한 편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 다 읽지도 않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덮으며 세이지는 소리 없이 웃었다. 늘 대단하다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니 새삼 놀라울 것도 없다. 더 읽을 생각이 없는지 세이지가 덮은 편지를 그대로 상자 속에 곱게 포개어 넣었다.
“선생님들도 웬만하면 다 알고 계시던데? Chamomile. 거의 5년 전 사람인데 아직도 Clary라는 성만 보면 캐모마일부터 떠오르나 봐.” 대단하다. 룸메이트의 입에서 순수한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세이지가 옅게 웃었다.
“세이지, 보통 그런 사람보곤 평범하다고 안 해.”
하긴, 너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지. 2년만 지나면 Clary라는 성은 Chamomile이 아닌 Sage가 갖게 될지도 모른다며 룸메이트가 말을 덧붙였다. 상자 뚜껑을 덮은 세이지는 그가 퍽 마음에 들었다. 입학식을 2주 앞두고 날아온 편지의 내용은 7년 전의 편지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몇 번 말했던 유안 웨일스, 세이지 너는 똑똑한 녀석이니까 기억하고 있겠지. 케인의 동생인데 이번에 세인트 폴에 들어온다고 하더군. 케인 녀석한테 백번 물어봐야 돌아오는 것도 없을 테니 네게 부탁하도록 할게, 세이지. 내 친애하는 케인 웨일스 군이 어느 하늘 아래서 호의호식하고 있는지 안부나 한번 물어다오.
안타깝게도 세이지 클라리는 캐모마일 클레리의 부탁을 귀여겨들을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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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폴의 입학식은 여전히 장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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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치곤 제법 서늘한 날씨였다. 언제고 흐리지 않던 때가 있었느냐마는 벌써 겨울이 찾아온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추운 아침에 빗소리까지 가미하니 대부분 학생이 몸을 일으키기 싫어할법한 질척질척한 하늘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가며 땅을 놀라게 하는 오늘이 꿀맛 같은 휴일이라는 점이었고 한 가지 불행인 것은 조부상으로 늦은 밤 급하게 기숙사를 나선 세이지 클라리의 룸메이트가 습관처럼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갔다는 점이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세이지가 눈가를 비비며 도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뼛속까지 저미는 듯한 추위에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걸어 잠그긴 했지만 아무래도 조금 어지러웠다. 작게 한숨과 같이 신음을 내뱉으며 세이지가 이불을 좀 더 끌어올렸다. 실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리 세이지 클라리라고 할지라도 이런 날씨에는―감기 기운을 빌려서 나마 잠시라도 쉬고 싶을 뿐이었다. 알람시계를 배급시간에 맞춰 놓은 세이지가 안심하고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으려던 순간,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세이지는 오늘 하루 편하게 쉬지 못하리라는 것을 느꼈다.
손님이 다시 한 번 노크하는 일이 없도록 세이지가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아마도 어젯밤 급히 외출하게 된 룸메이트와 관련된 것으로 사감 선생님이라도 오신 게 아닐까 생각했던 세이지의 앞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실루엣이 서 있었다. 옅은 백금발과 벽안, 부드러운 인상의 하얀 얼굴. 아직 옷이 주인과 친하지 않아 제법 고급스러운 마감에도 어딘가 빳빳하게 각이 잡혀 새 옷이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다니는 교복. (그는 분명 오늘 동아리 오리엔테이션을 들을 것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단정한 차림이 온화한 표정과 어우러져 근거 없는 믿음마저 얼핏 피어날 것만 같은 선량한 소년이었다.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이 소년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신입생 중 한 명이리라. 저에게 얼굴도 모르는 신입생이 찾아올 일은 없을 텐데, 세이지가 고개를 기웃거리기도 전에 눈앞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혹시 클라리 선배님?”
조심스러웠으나 그 어조는 제법 확신에 차있었다. 응, 맞아. 무슨 일이지? 세이지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나오자 그제야 소년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 제대로 찾아왔네요. 조심스럽게 주머니로 손을 옮긴 소년이 무언가를 꺼내 세이지 앞에 내밀었다. 금빛의 몸체와 십자가 중앙에 박힌 작은 루비가 영롱하게 빛나는 작은 크기의 묵주반지였다. 묵주반지 안쪽에는 작게 ‘S.C.’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2층 공동 샤워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주인이 있는 물건 같아서 찾아봤는데 다행이에요.”
천천히 제 오른손을 들어 텅 빈 손가락을 발견한 세이지가 작게 감탄했다. 묵주반지를 내밀고 있는 소년의 미소에 미소로 화답하며 묵주반지를 집어 들었다.
“이름, 물어도 될까?” 그 자리에서 묵주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넣은 세이지가 천천히 방문을 열어 재꼈다.
의아한 기색도 잠시, 조금 어색함이 느껴지는 자세로 소년이 작게 묵례하며 말했다.
“유안 웨일스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네, 이름에 보답하기 위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던 세이지는 옅은 미소를 짓다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시감에 입을 닫았다. 그대로 작은 의문이 피어났다. 웨일스?
“……케인 웨일스?”
이번엔 소년, 유안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났다. 어떻게, 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벙긋 벌렸던 유안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번쩍 스쳐 지나갔다.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유안이 반가운 얼굴로 세이지를 바라보았다.
“세이지 클레리?” “유안 웨일스?”
세이지의 입 끝에서 작은 웃음이 툭 튀어나왔다. 결국,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군. 기꺼이 세이지는 제 방문을 열어 손님을 들였다. 의도치 않았지만 들을 얘기도 보답할 것도 많을 것이다. 세이지 클라리는 유안 웨일스의 짧게 깎인 손톱이 마음에 들었다.
불타버린 잔해는 이 유려한 소년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겠어? 유안 웨일스 군. 세이지가 손목을 힐끔거렸다. 다행히 식사 전에 차를 우려낼 수 있을 법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