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빛이 감도는 검회색 머리칼은 10년의 세월을 거치며 세어버린건지 이전보다 잿빛에 가까워졌다.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반곱슬의 머리카락은 미용실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가위나 면도칼 따위를 이용해 듬성듬성 잘라낸 탓에 끄트머리가 제대로 정리되어있지 않으며 쥐가 파먹은 마냥 예쁘장하지 못하다. 머리카락 같은건 이젠 더이상 최선을 다해 정리하지 않는다. 뾰족하게 솟은 눈꼬리와 탁해진 금빛 눈동자는 이전보다 한결 더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 눈 밑으로 한껏 그늘진 다크서클도 그에 한몫 한다. 후드 티셔츠와 자켓, 통이 넓은 두터운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걸친 것들은 전부 산에서 구르기라도 한 마냥 낡았다. 입가, 손과 몸 곳곳에는 흉터가 빼곡하다.
[사회적이지 못한, 사교성 없는, 폐쇄적인]
사람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게 언제적이더라. 손가락을 꼽아보자면 벌써 3년전 인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느날 갑자기 모든 것을 그만두고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오지 속으로 도망친 그는 알파벳을 잊지 않은게 용한 수준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 간간히 혼잣말이라도 해오지 않았다면 말하는 법 조차도 잊었을 것이다. 핸드폰도 노트북도 없어 간간히 부모님과 편지를 통해 안부를 주고 받는 것이 그가 겪는 사회생활의 전부. 하지만 그가 갑자기 이렇게 변했느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닌 것이...
[예민한, 겁 많은, 회피적]
따지고보면 어릴때부터 그는 꽤나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말로는 그간, '세심하다'는 표현으로 대체 되어 그런 성정을 가릴 수 있었던게 아닐까. 예민하게 느끼지만 세심하게 행동하려했던 그는 결국 단순히 '예민한' 사람으로 남겨졌다. 더이상 표현을 다듬어 내뱉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다. 이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만한 모든 것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이 허락한 것들만 시야 속에 남긴다. 그러지 않으면 괴로워질 마음이 겁나기 때문에.
[염세적, 회의적, 신경질적]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건 곧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 무엇과도 싸우고 싶지 않다. 그런고로, 자신과의 싸움 역시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이제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아간다. 무기력함을 느끼게 될 것 같다면 시작조차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이제 단순히 툴툴 대기보단 신경질적인 경향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 그는 솔브로 돌아왔다. 반나절을 걷고, 또 12시간의 비행 끝에. 세상 일이라면 그게 뭐든 모른 척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께 전해 받은 편지의 마지막 문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왔느냐 묻는다면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에겐 아직 거칠거칠한 희망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7년]
호주 출생. 황금의 세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매점 탈환 사건 이후 1년은 더 공부하여 겨우 졸업했다. 하지만 졸업을 준비하며 1년간 제작한 생태학 저서 '깃털의 도약'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그렇게도 원하던 궁핍한 생활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졸업 직후, 솔브패스와 인기출판본 저자의 명예 덕분에 저명한 생태학 연구소와 거금의 계약을 성사시켜 부장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벌이가 넉넉해지면서 매년 솔브장학재단에 기부하거나 주변 친구들의 사업에 투자하는 등 원만한 사회활동을 겸해왔다.
하지만 3년 전 어느날, 그는 아무런 통보 없이 세상으로부터 종적을 감춰 행방불명 처리된다.
[3년]
3년전 그날, 그는 누구도 찾지 않을 세상 어딘가의 깊은 오지로 다급히 도망쳤다. 꽤 원만하게 지속해오던 친구들과의 연락도 3년 전을 마지막으로 단 한순간에 완전히 끊겨버렸다. 핸드폰도 노트북도 없어, 현재 비밀스럽게나마 연락하는 사람이라고는 부모님이 전부지만 그마저도 편지를 통해서 뿐이다. 그의 행방불명 소식은 꽤 여러 매체를 타고 세상 곳곳에 알려졌으나 결국 밝혀진 것 없이 종결되고 만다.
[솔브]
에이에게 연락을 받았던 사람은 그의 부모님. 그와는 직접 연락 닿을만한 길이 없으니 다른 수가 있겠나. 혹시나 그와 연락 된다면 전해달라며 남긴 학교에 대한 소식이 흐르고 흘러 그에게도 닿게 된다. (홈스쿨링을 허락 받던 시절부터도 그러했지만) 할시의 부모님은 그의 잠적 의사를 존중했기에 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쩐지 이것만큼은 전해야 할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편지를 전해받은 그는 먼 대양과 대륙을 건너 솔브로 돌아왔다. 솔브로 돌아온 그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급하게 인출한 10달러짜리 지폐 한 묶음과 부모님 명의로 만들어진 휴대전화 하나.
[저서]
새의 생태를 읽기 쉽도록 정리해 기록한 「깃털의 도약」이 베스트셀러로 등극된 이후 연구원으로 일하면서도 「비늘의 여정」, 「뿌리의 행진」을 차례로 출간했다. 「깃털의 도약」 만큼은 아니지만 세권 모두 라이센스만으로도 평생 먹고 살만한 판매 기록을 세운다. 현재는 모든 저작권을 부모님께 양도한 상황.
[IBTI 생명과학 연구소]
지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저명한 생명과학 연구소. 그는 이곳에서 생태학 부장 연구원으로 6년간 근무했다. 시설 규모가 큰 만큼 연구 수익 역시 상당하지만, 일각에서는 '상식 밖의 연구 수익 경로를 증명하라'며 투명성을 비판받곤 한다. 그가 행방불명 당시 재직중이던 기관임에도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이전보다는 한뼘 이상 자란 키, 단정하기는 커녕 지저분하게 자란 긴 머리, 예쁘장하다곤 말할 수 없는 불어난 덩치, 꾀죄죄하다 못해 꼴보기 싫을 정도의 허름한 옷과 행색, 지갑도 없이 자켓 주머니 안에 대강 쑤셔박아 놓은 달러 지폐 몇 장. 이전의 그를 찾아보고 싶어도 그 어디하나 단정한 구석이 없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 간만에 마주한 친구들이 반가울법 하지만 굳이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을 겉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망자 신분으로 친구들을 볼 낯이 없다. 몸 구석구석 은둔 생활 중 겪은 거친 흔적이 보인다. 기껏해야 아르바이트 탓에 굳은살이 조금 배여있던 손은 이제 온갖 크고 작은 흉터로 촘촘하다. 손바닥 안쪽에는 크게 베인 흉터가 자리잡고 있다.